밥으로 부르는 응원가!

조회수 7476 추천수 0 2012.01.26 19:21:59

밥으로 부르는 응원가!

 

충북 청원군 오송읍 연제리 박은희

 

한 일 년 전쯤 일이다. 전국을 강타한 구제역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그때의 이야기. 우리 집은 돼지를 천 두 가까이 기르는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가족이 힘을 합쳐 꾸려나가는 재미로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한다. 여유가 좀 생겨 농장 근처에 작은 논을 마련해서 몇 해 전부터는 식구들 먹을 쌀농사도 손수 짓고 농장 앞 텃밭에 고추며 감자, 고구마, 땅콩, 온갖 푸성귀를 농사지어 가족들 밥상을 차려낸다.

 

봄이 오면 온 천하가 나물들로 뒤덮이는 천해 환경도 나를 기쁘게 하는 것 중 하나다. 냉이는 지천으로 흔해서 조금만 손을 움직이면 시원한 냉잇국에 냉이무침이 뚝딱 만들어져 달달한 저녁 밥상머리가 된다. 여린 민들레 잎사귀를 뜯어다가 삼겹살 지글지글 구워 쌈을 싸먹으면 그 또한 일미요, 어린 쑥 뜯어다가 가을에 거둔 쌀 곱게 빻아 얼기설기 버무려서 찜통에 쪄내면 봄 향기 그만인 쑥버무리가 된다. 두릅나무에 어린 순이 올라오면 눈독을 들였다가 똑똑 꺾어서 끓는 물에 살짝 데치고 초장만 곁들여 내도 독특한 두릅향이 고된 노동으로 까칠한 가족들 입맛을 단번에 돌려놓는다.

 

여름이면 풋고추 뚝뚝 꺾어다가 된장에 찍어먹고, 장날 사다 뿌려놓은 상추 솎아서 밥 싸먹고, 감자 캐고 옥수수 따서 큰 솥 걸고 푹 쪄내서 넉넉하게 먹고 나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다.

 

가을이면 고추 따서 말리고 늦여름에 심은 배추며 무 무럭무럭 자라서 겨우내 먹을 김장을 100포기 정도 담아놓으면 삼시 세끼 차려야 하는 시골아낙에게 그만큼 든든한 뒷배가 없다. 늙은 호박이며 가지랑 무는 잘 썰어서 따끈한 가을볕에 사나흘 말려 겨우내 부식거리로 쓰고, 콩 털어 구수한 청국장 띄우면 혹독한 겨울 맞을 준비완료다.

 

하지만 이렇듯 자연이 주는 사시사철 호사스런 만찬도 이것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니 모두가 짐작하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이다. 한 해 농사지어 잘 쟁여둔 벼를 2주 정도 먹을 만큼만 바로바로 정미해서 지어먹는 밥의 풍미는 맛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하기도 어려울 만큼 찰지고 구수하다.

 

처음 추수하던 해에 어디서 중고 정미기를 구해온 남편은 손대면 부서질 것 같이 녹슬고 낡은 기계를 이리저리 만지더니 전기를 꽂고 가마니에서 벼를 한바가지 투입구에 퍼 넣고는 시작버튼을 눌렀다. 정미기는 털털거리며 쇳소리를 내더니 후두둑 후두둑 쭉정이를 뱉어내고는 이내 하얀 쌀을 아래 달린 통으로 쏟아냈다. 어찌나 신통방통하던지……. 고 녀석 덕에 우리 집은 일 년 내내 밥도둑 될 만한 반찬이 있든 없든 가족 모두 밥 한 그릇씩은 뚝딱이다.

 

이렇게 밥 잘 먹는 우리 식구들이 밥맛을 잃은 적이 있었는데 제 작년 겨울 지독한 구제역 때문에 농장 안에 콕 갇혀서 보낸 3개월이다. 방역선이 쳐지고 플래카드가 농장 진입로를 가로막고 나니 마치 사회로부터 격리 당하는 것 같은 낯설음과 구제역이 우리 농장에도 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으로 온 가족은 힘들어 했다. 출하가 막혀 당장 수입도 없고 하루에도 몇 번씩 돈사를 소독하고 치우는 고된 노동은 계속 됐지만 집에는 웃을 일도 없고 서로 어떤 어설픈 위로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봄이라도 돼야 산야의 나물로 맛난 반찬 해서 가족들 힘을 돋울 텐데……. 장에라도 나가야 고기며 생선이며 좀 사다가 가족들 기운 나게 만들 텐데……. 공연히 걱정만 쌓여가고 나도 우울감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도시락을 예쁘게 싸는 아가씨가 나와서 밥에다가 채소랑 김이랑 온갖 것들을 넣어가지고는 곰도 만들고 토끼도 만들고 하는 장면이 나왔다. 어찌나 아기자기하고 화사하던지 화면 밖에서 보고 있는데도 그 느낌이 산뜻하게 전해졌다.

그래, 바로 저거야.”

 

주방으로 간 나는 우선 고슬고슬한 밥에 간장하고 참기름을 넣어서 조물조물 버무리고 뭐 장식할 것이 없나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냉장고에 있는 것이라고는 김치가 전부고 그 흔한 달걀 하나, 김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았다. 호박이며 가지며 각종 나물 말려놓은 것도 벌써 동이 났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지. 김치하고 감자하고 있는 대로 볶아서 반짝반짝 윤기 나는 밥을 섞고 접시에 담아 꽃 모양, 별 모양, 하트 모양 등 낼 수 있는 모양이란 모양은 다 내고 버무려 놓은 간장밥은 동글동글 굴려서 그 옆을 장식했다.

 

오전 축사 일을 마치고 축 처진 어깨로 내려온 가족들에게 멀건 된장국과 최선을 다해 예쁘게 꾸민 볶음밥을 내어놓으니 다들 이게 뭐래?” 하며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린다. 그래도 그렇게 한번 웃고, 그렇게 한번 기운 받으며 우리는 혹독한 그해 겨울을 잘 이겨냈다.

 

어머니에게 밥은 그냥 밥이 아니고 가족에 대한 무한 사랑이라는 말을 어디서 주워들은 적이 있다. 그해 겨울 우리 가족을 지켜준 것은 뜨끈한 밥에 담긴 무언의 응원과 사랑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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