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구·춘천·대전·부산 전국 떡볶이 명가 총집합
전국에 흩어져 있는 떡볶이 명가들은 최소 20년이 넘는 사연을 안고 있다.
긴 역사만큼 자초지종도 다채롭다.
얄개들의 놀이터였거나 콧물 줄줄 흘리는 초등학생들의 밥상이었다.
가 주인장들을 직접 만나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을 들었다.
사연도 사연이지만 저마다 다른 맛의 비법이 있었다.
맛은 소스에 함축되어 있었다. 소스는 생명이었다.
빠르게 변하는 사람들의 혀를 꼭 붙들어매는 마술 같은 힘을 발휘했다.
광주 무진장떡볶이 → 떡볶이 빈자리에 볶음밥 지글
태권도학원 승합차가 ‘무진장떡볶이’집 앞에 선다. 열댓명의 초등학생들이 재잘재잘하며 내린다. 주산학원 차도 속속 도착한다. 오늘은 선생님이 한턱 쏘는 날! 쫄깃한 떡과 라면, 쫄면 사리가 듬뿍 든 프라이팬이 나타난다. 함성이 쏟아진다. 한쪽에는 조선대학교 부속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프라이팬 바닥을 박박 긁고 있다. 살레시오여고와 송원여고 학생들도 질세라 들이닥친다. 식탁 옆 통로는 발 디딜 틈이 없다. 빈자리를 차지하려는 매서운 눈초리들이 보글보글 끓는 즉석떡볶이를 노려본다.
29년 전 광주 즉석떡볶이집 ‘무진장떡볶이’(광주광역시 동구 서석동)의 풍경이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한차례 밀물처럼 쓸고 가면 대학생들이 몰려왔다. 밤 10시가 넘어 찾아오는 조선대학교 야간 대학생들까지 치러내야 하루가 끝났다. “광주에서 학교 다닌 애기들은 우리 집 다 알아. 문 열기도 전에 두들기는 애기도 있어. 학교 땡땡이친 애기들이지.” 주인 한양수(63)씨의 증언이다. 선생님에게 잡혀 끌려간 “애기”도 여럿 있었다.
교복 치마를 질끈 묶고 오직 달콤한 떡볶이를 먹어보겠다고 학교 담벼락을 넘다 허벅지가 긁힌 여고생들은 한씨에게 훈장처럼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때 애기들은 속도 없었어. 다 엄마 되었어.” 1983년 문을 연 ‘무진장떡볶이’는 당시만 해도 즉석떡볶이가 생소하던 광주에서 얄개들의 안식처였다. “미팅 장소로 유명했지. 우리 집에 여학생들이 많잖아. 남학생들이 찾아와. 먹다가 지들끼리 눈이 맞아 나가고 그랬어.” 아무리 얄개들의 천국이라고 해도 맛이 없으면 찾지 않는 법. 1㎏짜리 떡볶이 한 봉지가 하루에 15개씩 팔려나갔다. 맛의 비법은 남다른 소스에 있었다. “고춧가루는 전혀 안 들어가. 18가지 양념을 섞었지. 공개 못 해.” 다시마 같은 해조류 등으로 우린 육수, 쌀떡, 갖은 채소가 재료다. 푸짐한 프라이팬에 눌어붙은 사리를 뜯어 먹는 맛이 제법이다.
색은 빨갛지만 그다지 맵지 않다. 떡과 사리를 적당히 건져 먹고 나면 밥 한사발, 김 가루 등을 넣어 지글지글 볶아 먹는 밥이 화룡점정이다. 가격도 인기의 비결이었다. 29년 전 떡볶이는 500원, 라면 사리는 150원, 쫄면 사리는 200원이었다. 푸짐했다. 지금 떡볶이 가격은 1500원. 8년 전과 같다.
충청도가 고향인 한씨는 서른 살에 정읍 총각과 결혼을 했다. 남편 직장을 따라 광주에 보금자리를 마련했지만 80년대 초 남편이 실직을 하자 생활전선에 나섰다. “친정어머니, 시어머니 솜씨가 좋았어. 난 맹렬 여성이었어.” 집 한 채 값을 날리고 한씨 부부는 떡볶이집을 열었다. 단돈 500만원으로 시작했다. 입소문을 타면서 가게가 바빠지자 부산에 있던 동생 한홍수(59)씨를 불렀다. 부침도 심했다. 현재 업장은 세 번째 이사한 곳이다. 철거, 임대료 인상 등이 이유였다. 요즘은 주5일제 수업, 피자, 맥도날드 햄버거 같은 간식거리, 1000원 김밥 등이 생겨 장사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그래도 더 큰 욕심은 없다. “시동생까지 해서 대학생 셋을 공부시켰어.” 여전히 그 시절이 그리운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딸 최원지(12)양을 데리고 이곳을 찾은 주부 정미영(43)씨는 “조대 88학번이에요. 추억 찾아 이곳에 왔어요”라고 말한다.
대구 윤옥연할매떡볶이 → 마약보다 강한 중독?
“할매 여긴닝기요. 이삼삼 주소.” 걸쭉한 사투리를 쓰는 남자가 문을 열면서 한마디 한다. “할머니 이삼삼이 뭐예요?” 물었다. “니 모리나, 대구 사람 아닝게베. 떡 이천원, 오뎅 삼천원, 만두 삼천원 소리데이. 대구에서 내 모르면 간첩이라 카는데, 마약떡볶이 할매라고 카는데.”
약 40년째(1976년) 매운 이른바 ‘신천동 마약떡볶이’를 팔고 있는 윤옥연(73) 할머니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스물서이(23살) 시집와서 할배 직장 떨어지고 안 해본 거 없는 기라. 운이 터져 성공했다 아이가. 서울서 인터뷰 오고 줄 서고 사람들 찾아왔다. 전국 택배도 한다. 얼가서(얼려서) 미국도 간다카이. 안 무봤나베.” 입소문이 나고 방송 보도가 많이 나간 맛집들이 흔히 겪는 수난을 할머니도 치렀다.
“‘신천동 할매’ 특허 내라고 했지, 뭐 할라꼬 했다. 다른 사람이 해버렸다카이.” 며느리 변인자(45)씨는 “할매(시어머니를 할매라고 부른다)가 고마 방송 나간 테이프 빌려주고 했어. 특허 낸 사람이 그걸 복사해서 간 거야”라고 회고한다. 할머니와 가족들은 소송을 준비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대신 간판에 할머니 얼굴과 ‘윤옥연 할매 떡볶이’란 이름을 바꿔 달았다.
10년 전 일이다. 할머니 떡볶이는 아주 맵다. 입안을 혀로 쓸어내려도 소용이 없다. 핫소스를 통째로 뿌린 느낌이다. 차고 단 음료를 바로 찾게 된다. 하지만 돌아서면 자꾸 생각이 난다. 비법을 물었다. “뭘라 알라카노! 며느리도 몰라. 내 죽을라 카면 갈켜줘야지 아직 멀었다카이.” 변씨가 거든다. 청양고추가 비법 중에 하나란다. 고추장은 안 쓰고 고춧가루를 개서 쓴다. 설탕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10가지 넘는 양념의 배합률은 할머니만 안다. 떡은 밀가루 떡이다. 5년 전 지금 본점 자리인 수성4가로 건물을 지어 오면서 같이 했던 큰딸 김정순(52)씨는 인근에 독립했다. 둘째 아들과 막내딸도 할머니가 만든 소스로 ‘윤옥연 할매 떡볶이’를 운영한다. “니 모르제, 내는 떡볶이 못 묵는다. 단골이 간 봐준기라.”
강원 춘천 꽃돼지분식 → 한접시 500원, 29년 전 그대로
“레전드(전설)예요. 레전드! 춘중생(춘천중학생) 만나면 ‘너 거기 알지’ 제일 먼저 물어봐요. ‘거기’ 모르면 가짜예요. ‘거기’가 바로 여기 꽃돼지분식이에요.” 강원대 4학년인 신민철씨는 ‘꽃돼지분식’의 떡볶이를 먹고 자랐다. “그때 학교 급식이 너무 맛이 없었어요. 친구들과 돈을 모아 몰래 빠져나와 먹었어요.”
그의 기억에 ‘꽃돼지분식’ 할머니는 재미있는 분이었다. “먹기 전에 할머니한테 500원을 냈어요. 나가는데 받으신 거 잊으신 거예요. 또 드렸죠. 어떤 날은 안 받으신 거예요. 받았다고 생각하신 거죠.” ‘꽃돼지분식’은 시간이 멈춘 곳이다. 까만 연탄난로, 조금만 열려도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문짝, 먼지 낀 거울, 굵은 날짜가 새겨진 달력, 둘둘 말린 두루마리 휴지가 이곳의 풍경이다. 80년대로 쏙 하고 빨려 들어간 듯한 이곳은 맛도 가격도 29년 전과 같다.
주인할머니 이기홍(77)씨는 지금도 떡볶이를 500원에 판다. “애들이 와서 시내에는 작은 컵에 천원 한다고 해. 어떻게 올려. 애들이 무슨 돈이 있어.” 달걀은 200원, 만두는 100원이다. 싼 가격이 이 집의 경쟁력은 아니다.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맛보기 힘든 달걀이 있다. 바로 곤달걀이다. 곤달걀은 부화 직전의 달걀을 말한다.
삶은 달걀을 반으로 쪼개면 흰자와 노른자의 구별이 없다. 20년 넘게 거래한 달걀장수가 포천에서 가져다준다고 한다. 빨간 떡볶이 양념을 둘둘 말아 입은 달걀은 잘 익은 밤톨 같다. 구수한 달걀은 다디단 떡볶이와 잘 어울린다. “맛 별거 없어. 물 붓고 고추장 넣고 파 넣고 끓이는 거지, 고춧가루는 안 넣어. 백퍼센트 쌀이야. 봉지에 다 적혀 있어.” 특별한 것도 없어 보이는 할머니의 떡볶이는 입소문을 타고 화천, 양구 등에서도 사러 올 정도였다. 티브이 프로그램에도 나갔다. 방송을 본 군인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할머니는 안 해본 장사가 없었다. “산골 가서 무 캐서 팔고, 의암댐 내가 다 지었어. 애들 자갈밭에 놀게 하고 돌 골랐지. 일당 몇 푼 안 돼. 밀가루 몇 부대 샀지.” 다리가 불편해 무릎을 끈으로 질끈 동여맨 할머니는 18살에 결혼을 했다. “할아버지는 열한 살 많았어. 노동했어. 술병으로 간 지 벌써 18년 전이네.” 할머니는 아픈 상처가 많다. 6년 전 외아들은 뇌종양으로 보냈다. “환장했지. 지금도 손님이 없으면 가슴이 벌렁거려.” 동네 노인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할머니 떡볶이 주세요” 외치는 꼬마들이 문을 여는 이곳은 춘천시 근화동 사랑방이다.
대전 바로 그 집 → 아이스크림보다 부드럽고 달콤한
저 김재현은 올해로 쉰아홉입니다. 25년간 햇빛을 자주 못 보고 살았어요. 햇빛 알레르기가 있냐구요? 아닙니다. 제 떡볶이집 ‘바로 그 집’이 대전시 중구 대흥동 지하상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살 어린 아내 신순금과 같이 해요. 30대에 건설회사를 다녔어요. 해외에서 5년 정도 있었지요. 돈도 많이 벌었어요.
그때는 백억대 재산가였어요. 사업을 했지요. 부도를 세게 맞았어요. 아내가 나 모르게 돈을 모아둔 게 있었어요. 그걸로 분식점을 열었어요. 1년 반 고생했어요. 문만 열면 사람들이 올 줄 알았어요. 서울에서 음식 잘한다는 주방장을 모시고 왔어요. 열심히 배웠어요.
저희 집 소스 특이하죠? 매운 것 같으면서 부드럽고 달다고요? 사람들은 느끼하다고까지 말해요. 누구는 마요네즈를 넣은 거 아니냐고 하는데, 아이스크림 재료가 들어가요. 제과제빵 재료인 탈지분유 같은 거죠. 젊은 사람들 입맛에 맞췄어요. 고춧가루를 써요. 중탕으로 떡볶이 익혀요. 프라이팬 아래에 물이 끓죠. 우리 떡은 쌀이긴 한데 정부가 쌀과자 등을 만들라고 방출하는 쌀로 만들어요. 일종의 정부미인 셈이죠. 맛있다고 소문나니깐 방송국에서 왔어요. 8번이나 텔레비전에 나갔어요. 우리 집은 둘째 아들 영민이가 이어갈 겁니다. 참, 지난주에 영민이가 서울 이화여대 앞에 분점을 냈어요. 돈이 많을 때 기고만장했죠. 철저하게 망하고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할 때 저를 도와준 사람은 돈이 없는 서민들이었어요.
부산 다리집 → 학생들이 제보한 특종의 맛
부산광역시 수영구 남천동 ‘다리집’ 떡볶이는 굵다. 가래떡에 양념을 적셨다. 빨간 양념이 적당히 배어 매콤하고 쫄깃한 쌀떡의 질감이 살아 있다. 손바닥 2장을 이어 붙인 것처럼 긴 오징어튀김도 별미다. 큰 가위로 뚝뚝 잘라 양념에 묻혀 먹는다. 주인 정삼식(74)씨는 “한 30년 되지예”라고 말한다. 경상도 함안에서 농사짓던 정씨는 25살에 부산에 왔다. “여름에는 찹은(찬) 얼음 팔았고 겨울에는 호떡, 찐빵 팔았어예.” 가건물에서 동갑내기 아내 김천자씨가 개발한 소스로 떡볶이를 만들어 팔았다. 인기를 끌었다. 고추장과 고춧가루, 물엿 등을 적당히 배합한 것이다.
“동여고(부산동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많이 왔어예.” 동여고 학생들은 2003년 <한국방송> ‘경제특종’에 제보도 했다. 방송 출연이 줄을 이었다. ‘다리집’이라는 이름도 동여고 학생들 때문에 붙여졌다. “아~들이 스커트 입고 들어와 먹었지예. 천막을 쳤는데 밖에서 보면 다리만 보이는기라예. 학교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다리 보이는 집에 가면 안 된다’ 했어예.” 30년 전 떡볶이 한 개에 100원 하던 것이 이제는 3개 2500원이다. “부산, 울산 시집간 아~들이 명절에 꼭 와예.” ‘다리집’은 현재 대승·대중 두 아들이 가업을 잇고 있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