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을 넘어선 봄나물들 (사랑은 맛을 타고)

조회수 8066 추천수 0 2012.05.02 12:10:40

아파트 단지 내 벚나무의 벚꽃이 진자리에 어느 새 손톱만한 크기의 연둣빛 새잎들이 돋아나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이 자연의 신비로움에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워

살림의 달인들인 통로 줌마들을 꼬드겨 우리가 사는 보금자리에서 십 여분 거리에 있는 들판에 나가 쑥부쟁이이며 쑥, 돌미나리등을 캐왔다.

몇 년 째 이렇게 나물 캐는 일을 즐거워하는 것은 장바구니 물가가 높아서일까?

넘쳐나는 마트 신선 식품과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영양가 풍부한 나물이라서? 아니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자연이 주는 신비함과 풍요로움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그 자연에 흠뻑 빠져보고 싶어서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캐온 나물들을 정갈하게 다듬어 쑥은 쓴물을 빼서 씻어놓고 쑥부쟁이는 살짝 삶아 물기를 빼고 에이포 크기의 지퍼팩에 납작하게 펴 담는다.

냉동고 문을 여니 한 달 전에 씻고 데쳐서 같은 방법으로 얼려놓은 보리와 냉이가 한 칸 가득 쌓여 있다.

그 아래 칸에 다시 쑥과 쑥부쟁이를 차곡차곡 넣어둔다.

아! 이 풍요로움! 아침 식사로는 김치된장국외에는 그 어떤 반찬도 국도 먹지 않은 舊郞이기에 365일 김치된장국만 먹일 수 없어 그 국에 이런 봄나물들을 번갈아 넣어 가며 끓여줄 요량으로 정성껏 마련한 나물들이다. 그런데 순간 마음이 울컥 해진다.

몇 달 전부터 다른 여성과 분홍빛 연정에 빠져 있는 이 구랑이 미운건지 싫은 건지도 모르는 체 구랑을 위해 준비한 나물들이 의미가 없어져 보였기 때문이다.

파릇파릇하게 데쳐 담아놓은 봄나물들이 나를 서럽게 했다.

이것들을 어찌 할까? 확 버려버릴까? 말까? 아니다.

펄펄 끓는 김치된장국에 이 나물들을 넣을 때 마다 구랑에 대한 배신감과 상실감까지 함께 넣고 끓여 식탁에 올리자.

청량고추도 숭숭 썰어 넣어 칼칼하고 매콤한 20 년 지기의 우월함을 뽐내자.

아무렴 그 여성과의 풋풋함이 이 봄나물만 하겠냐.

총각시절 자취하면서 불규칙한 식사, 무절제한 음주로 얻은 위장병을 치유하기위해

결혼생활 8,300여 일 중 약 팔천일은 아침식사를 된장국 한 그릇으로 투쟁 해 온 구랑이다.

그 노력의 댓가로 그토록 마시고 싶어 하는 커피까지 마실 수 있을 만큼 ‘사람이 되었다’

구랑의 초 간단 아침식사 덕분에 나는 아침식사 준비를 위한 번거러움은 피할 수 있었지만

또 김치된장국만큼은 다양하게 끓여 낼 수 있는 노하우를 쌓았다.

그 실력 하나로 구랑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이 막연한 자.만.심.

잠깐 우울했던 마음을 접고 냉동고문을 가만히 닫는다.

기다려다오 초록 나물들아. 내 사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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