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번쩍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겨울메뉴

박미향 2013.01.17
조회수 20616 추천수 0

 새콤하게 언 김치에
 밥 비빈 김치말이밥
 겨울철 이북 별미
 
 쫄깃쫄깃 탱탱한
 냉우동
 눈 씹듯 시원한
 팥빙수도 후련한 맛
 
pmhp.jpg

‘이북손만두’  김치말이밥


 “몸 안에 첫눈을 내리게 하기 위해서요, 뜨거워진 가슴을 식혀야죠. 영혼의 소방차라고 할까요.” 밴드 크라잉넛의 한경록씨가 겨울철 팥빙수를 먹는 이유다. 요즘 그의 하루 식습관은 냉면과 팥빙수로 이어지는 순환계다. 차가운 팥빙수 한 그릇을 후딱 해치우고 잠자리에 든다. 영하로 내려간 추운 겨울을 칼바람처럼 찬 음식으로 이겨낸다. 이냉치냉(以冷治冷)이다. 찬 음식으로 추위를 쫓아내는 것도 이 겨울을 이겨내는 한 가지 방법이다.
 그가 찾는 냉면은 대표적인 겨울 음식이다. <동국세시기>(1849년)에 11월 음식으로 소개되어 있다. 평안도가 고향인 이들은 겨울에 따스한 아랫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먹는 냉면 맛이 최고라고 한다.
 냉면만 북쪽이 고향인 찬 음식은 아니다. ‘이북손만두’를 운영하는 박혜숙(73)씨의 기억에는 어머니가 만들어준 김치말이밥이 있다. 평양에서 살았던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한옥에 살았어요. 집 앞에는 대동강이 흐르고 집 뒤쪽에는 김일성광장인가가 있었지요. 옛날에 뭐 먹을 거 있었나요. 한겨울 밤은 길고 오락거리도 없었죠.” 시커먼 겨울밤이 창 안으로 쑥 들어온 11시께에 여섯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아버지가 “뭐 먹을 거 없나” 말하곤 했다. 박씨의 어머니 이정옥(작고)씨가 사뿐히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쌩쌩 북쪽 바람은 위력이 초특급이다. 살을 파고든다. 열개의 독이 줄지어 서 있는 장독대에는 녹지 않은 눈이 수북하다. 어머니는 손으로 찬 눈을 헤치고 독 뚜껑을 열었다. 김치 위에는 뾰쪽뾰쪽 얼음이 언 대동강 물줄기처럼 깔려 있었다. 큰 바가지에 얼음조각까지 푹 퍼서 김치 한 포기를 담는다. 아랫목에 넣었지만 추운 겨울 위력에 이미 식은 밥을 쓱쓱 썬 김치에 넣어 비볐다. 맛을 내기 위해 참기름도 송송 뿌린다. 온 가족이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커다란 그릇에 담긴 김치말이밥을 떠서 먹으면 하하호호 웃음꽃을 피웠다. 박씨는 덜덜 떨면서 먹었던 그때 그 맛이 지금도 선하다. “짜지 않고 슴슴했어요. 먹으면서 이런저런 재미난 이야기를 나눴죠. 밥알이 더 꼬들꼬들했어요.” 북쪽 김치는 추운 날씨 탓에 그다지 짜게 만들지 않는다. 더운 날씨 때문에 쉽게 상할까 싶어 젓갈 등을 많이 넣어 담그는 남쪽 지방 김치와는 달랐다. “우리 집은 김장할 때 사골국물을 넣어요. 젓갈을 안 넣죠. 물김치와는 달라요. 김치말이밥에는 우리 집 김치가 딱 맞아요.” 배추를 절이는 것은 남쪽 지방과 같다. 파, 무채 등 김치의 속재료를 사골국물에 버무렸다. ‘이북손만두’는 4대째 서울 중구 무교동 한옥을 지키고 있다. 박씨는 1990년 어머니의 손맛이 그리워 그 시절 그 맛 그대로 밥상을 차려 ‘이북손만두’를 열었다. 이곳 차림표에 있는 김치말이밥은 독 안에 살짝 언 얼음 대신 네모난 각얼음이 들어가고 넉넉한 국물을 내기 위해 생수도 들어가지만 사골국물이 들어간 김치와 참기름, 깨소금으로 버무린 그 맛은 그대로다. 아들 장윤섭(44)씨는 “일주일에 50포기씩 김치를 담급니다. 사골국물은 3일 밤낮을 끓여요”라고 말했다. ‘이북손만두’의 김치말이밥을 한입 무는 순간 뒷골에서 땡 소리가 난다. 식도를 타고 찬 기운이 들어와 온몸을 접수한다. 시원한 속 탓에 몸 밖 추위를 신경쓸 틈이 없다.

 

pmh.jpg

‘스바루’의 새우튀김냉우동


 냉우동도 추위를 달래는 음식이다. 소바전문집으로 유명한 ‘스바루’에는 세 가지의 찬 우동이 있다. 자루우동, 새우튀김우동, 마우동. 일본의 소바집에는 우동을 함께 파는 곳이 많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냉면처럼 찬 국물에 면이 담겨 나오는 게 아니라 소바처럼 찬 면이 따로 나온다. 면을 파나 마가 들어간 소스에 찍어 먹는다. 메밀면보다 퉁퉁한 우동면은 보드라운 눈뭉치 같다. 쓰유(간장소스)에 푹 담가 먹으니 탱탱한 찬 맛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주인 강영철(55)씨는 “일본 간사이(관서)지방 사람들은 우동을, 간토(관동)지방 사람들은 메밀을 좋아해요. 사누키우동이 유명해지면서 도쿄에도 우동이 많이 퍼지긴 했죠.” 사누키우동은 일본 가가와현 사누키지방이 고향이다. 면발이 탱탱하고 굵은 것이 특징이다. 면 반죽을 발로 밟는다. 양념이 더 잘 스며들어 맛이 좋다고 한다. “한 번에 약 20분 밟아서 만듭니다.” 그러고 나면 4시간가량 숙성시킨다. 뜨끈한 우동과는 다른 냉우동만의 새침한 찬 맛이 매력적이다.

 

pmhm.jpg

‘경성팥집 옥루몽’의 가마솥 전통팥빙수


 밥과 면으로 한끼 속을 넉넉히 채웠다면 디저트 차례다. 팥빙수는 친근한 찬 후식이다. 2012년 7월 홍대 먹자골목에 문을 열어 단박에 팥빙수 마니아들의 사랑을 차지한 ‘경성팥집 옥루몽’을 찾았다. 누런 놋그릇에 뽀얀 얼음가루와 달콤한 팥이 수북하게 올라가 있다. 문 밖에 쌓인 눈뭉치를 그대로 몸에 모시는 기분이 든다. 종업원 허지원(23)씨는 “여름보다는 찾는 이가 줄었지만 여전히 오시는 분들이 많아요”라고 말한다. 그는 “국산 팥을 정성스럽게 삶고 연유와 다른 재료를 넣어 만든 저희 집만의 소스가 맛의 비결이에요”라고 전한다. 녹차빙수, 와인빙수, 과일빙수 등 다양한 모양새의 빙수가 유행했지만 팥과 빙수만 들어간 고전적인 형태의 빙수가 여전히 강세다.
 빙수의 시작은 꽤 오래전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베이징에서 먹었던 빙수제조법이 등장한다. 요즘 같은 우리네 팥빙수는 일제강점기에 등장했다고 한다. 단팥을 얹어 먹었던 일본 음식이 전해지면서 부터란다. 당시 빙수장수는 얼음에 설탕이나 팥, 노란 물, 빨간 물을 얹어 팔았다. 팥빙수의 단맛을 내는 연유는 서울우유가 1963년 처음 만들었다. 팥빙수는 팥이 맛을 좌우한다. 굵기가 일정하고 색이 선명한 것이 좋다. 팥은 토종 팥, 토종 팥을 개량한 국산 팥, 중국산 팥이 있다. 당연히 토종 팥이 맛이 좋다. 삶아도 탱탱한 겉껍질이 살아있다. 하지만 국내 주로 유통되는 팥은 개량종이 많다. 삶는 기술과 팥과 얼음, 연유 등의 배합 비율도 맛에 영향을 미친다. 사기에 마치 고봉밥처럼 나오는 ‘합’(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팥빙수와 신세계백화점 경기점 7층 ‘레드빈’의 팥빙수도 맛볼 만하다. 
♣H6s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첨부
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이메일 : mh@hani.co.kr       트위터 : psolsol      

최신글

엮인글 :
http://kkini.hani.co.kr/12915/b65/trackback
List of Articles

‘옥류관 요리사’가 말하는 평양냉면 숨겨진 맛 비결

  • 끼니
  • | 2018.06.22

“면 반죽에 식소다 넣어···꿩고기 육수에 간장 조금” 남쪽 냉면 식도락가들과 비교해보니 ‘숯골원냉면’ ‘평남면옥’ 등 재료 비슷한 곳 많아 지난 2일 오후 평양 냉면 전문점인 옥류관에서 걸그룹 레드밸벳이 냉면을 먹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일 평양에서 첫 공연을 마친 남쪽 예술단은 2일 유명한 평양 맛집 ‘옥류관’을 찾았다. 이날 가수 백지영은 옥류관의 메뉴인 ...

“두부전골 맛 세계 최고죠…이탈리아에 한식 알릴터”

  • 끼니
  • | 2017.10.31

팬들과 ‘한식 데이트’ 방송인 알베르토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 “두부전골은 정말 대단해요. 세계에서 최고인 거 같아요. 두부김치, 구운 두부 다 맛있어요.” 10월 11일 저녁 7시, 서울 가회동에 있는 모던 한식당 ‘두레유’에선 알베르토 몬디(33)의 두부 예찬이 시작됐다. 그는 <제이티비시>(JTBC)의 ‘비정상회담’ 등에 출연해 인기 스타 반열에 오른 이탈리아 출신 방송인...

혀가 얼얼·귀가 사각사각···이거 별미네

  • 끼니
  • | 2017.10.16

중식 대가 신계숙 교수의 중식 예찬 “유가사상을 이해해야 그 맛 제대로 알아” 깐풍닭날개(干烹?翅). 박미향 기자 “뻑뻑한 살을 왜 먹어요? 맛없어요.” 지난달 배화여자대학교 신계숙(53) 전통조리학과 교수는 서울 후암동 자신의 쿠킹 스튜디오로 지인들을 초청해 한 상 떡하니 중식을 차리고 재미난 얘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호남고추생선찜’(?椒??)은 모양...

짜장면으로 꽃피운 40년 세월, 이제는 스타

  • 끼니
  • | 2017.06.12

[ESC 창간 10돌 기념호] 2007년 ESC 등장 이연복 요리사···아재 식도락가 노중훈, 페이스트리 셰프 성현아와 야식토크 지난 10년, 요리사 스타 등극 중식 요리사 이연복 대표적 식품 아닌 의류 광고까지 찍어 여러 세대 공감 능력이 매력 왼쪽부터 이연복, 성현아, 노중훈, 박미향. 홍종길 기자 ‘쿡방’ ‘먹방’ ‘치느님’ ‘면스플레인’. 10년 전만 해도 세상에 없던 ...

야구해설 고수들 ‘야구 맛집’ 보따리 풀다

  • 끼니
  • | 2017.04.06

야구 해설위원·캐스터가 귀띔한 전국 야구장 주변 맛집 푸짐하고 시원한 사직구장 막국수 옻닭백숙은 중계팀 단골 회식메뉴 이종범 반한 ‘우아한 곰탕’의 진수 마산구장엔 야들야들 옛날맛불고기 창원 ’장원갈비’의 ’옛날맛 불고기’. 박미향 기자 지난 3월31일 ‘2017 타이어뱅크 케이비오(KBO)리그’가 개막했다. 야구 시즌이 시작되면 야구선수들만큼이나 바쁜 이들이 스포츠캐...

카레로 가볍게 vs 고기로 묵직하게

  • 끼니
  • | 2016.12.14

정호영·다니엘 셰프가 각각 소개하는 일본·스웨덴식 해장법 정호영 셰프가 만든 일본의 해장요리 ’스지카레’. 박미향 기자 주는 기분을 들뜨게 하는 엔도르핀이라는 천국을 선물하고, 숙취라는 지옥을 보너스로 배달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애주가에게 숙취는 골치 아픈 숙제다. 작가의 실제 음주습관을 소재로 삼은 일본 만화 <음주가무연구소>나 미국 할리우드 영화 <행오버>는...

정신이 번쩍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겨울메뉴

  • 박미향
  • | 2013.01.17

 새콤하게 언 김치에  밥 비빈 김치말이밥  겨울철 이북 별미    쫄깃쫄깃 탱탱한  냉우동  눈 씹듯 시원한  팥빙수도 후련한 맛   ‘이북손만두’ 김치말이밥  “몸 안에 첫눈을 내리게 하기 위해서요, 뜨거워진 가슴을 식혀야죠. 영혼의 소방차라고 할까요.” 밴드 크라잉넛의 한경록씨가 겨울철 팥빙수를 먹는 이유다. 요즘 그의 하루 식습관은 냉면과 팥빙수로 이어...

한국식 피시소스 제주어간장 아시나요

  • 운영자
  • | 2012.10.15

문순천(45) 사라져가는 전통 음식 어간장…현대식으로 개발해 유통하는 해어림“베지근하다게.”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 주민 김대윤(65)씨는 어릴 때 먹었던 ‘멜젓(멸치젓갈)을 끓여 만든 장’ 맛을 한마디로 표현한다. ‘맛나다’와 비슷한 뜻의 제주도 말이다. “멜젓을 한참 먹고 나면 살은 없어지고 가시하고 흥건한 물만 남아요.” 김씨의 어머니는 그것을 끓여서 장을...

‘음식이 아니무니다’

  • 박미향
  • | 2012.08.16

웹툰 ‘역전! 야매요리’로 인기몰이·부천국제만화축제 초청받은 정다정 작가박태환과 쑨양이 나란히 앉아 사이좋게 쿠키를 먹는다. ‘비주얼은 곰팡이 핀 된장에다가 맛은 9천원짜리 타이어를 씹는 느낌’이다. “태환 오빠, 이거 드시면 저랑 사귀는 거에여” 요리를 만든 토끼가 외치자 박태환 선수는 “안 머겅” 답한다. 쿠키의 제조 과정은 열 번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올...

무잼, 마늘잼, 다시마잼 드셔보셔~ [1]

  • 박미향
  • | 2012.08.16

사진 왼쪽부터 참외잼, 마늘잼, 무잼, 다시마잼. 제주도산 재료로 건강 수제잼 만드는 ‘미스터잼’…특이한 재료 이용한 잼 레시피도 제공혹시 들어 보셨는지요? 무잼, 마늘잼, 다시마잼을! 김치 재료로 쓰는 매운 무와 마늘, 시커먼 다시마로 잼을 만든다고요? 제주시 삼도2동에 터를 잡은 ‘미스터잼’(www.mrjam.co.kr)에는 귀가 솔깃한 잼이 많다. 현재 인기가 있는 5가지 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