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 배달…맛골목 조성…호텔의 ‘변신’

끼니 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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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 높은 고급호텔들, 경쟁력 키우려 ‘대중화’로 눈 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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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더블유(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의 레스토랑 ‘비엘티(BLT)스테이크’가 배달서비스 할 햄버거.

엄청난 속도로 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무엇이든 변한다는 것이다. 거대 도시 서울의 외식문화도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1970년대 이후 2000년대까지 고급 외식의 대명사는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넘보기 힘들어 보였던 호텔 레스토랑의 위상은 2000년대 중반 해외파 셰프들이 귀국해 고급스러운 자신의 레스토랑을 열면서 위기를 맞았다. 지나치게 문턱이 높아 접근이 힘들어 보이는 것도 위기의 한 요인이 됐다. 이런 외식문화의 흐름에 호텔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고급호텔의 진화’인 셈이다.

JW메리어트동대문, 햄버거 배달?

꽉, 베어 물자 육즙이 주르륵 흘러 혀를 감싸버렸다. 볼이 살짝 달아오를 정도로 육감적이었다. 식욕과 성욕은 한 끗 차이라고 했나! 지난 1일 시식회에서 맛본, 6~7㎝ 높이의 제이더블유(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의 레스토랑 ‘비엘티(BLT) 스테이크’의 고급 햄버거는 관능적이었다. 아삭한 양상추 위에 얇게 자른 토마토와 두툼한 쇠고기 패티가 올라간 고급 햄버거였다. 감자가루가 25% 들어간 번(부드러운 롤빵의 일종. 햄버거빵)이 여러 가지 속재료를 껴안고 있었다. 폰탈치즈(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에서 주로 생산하는 치즈)와 베이컨까지 들어가 여러가지 식감을 즐길 수 있다. 가격은 프렌치프라이와 음료, 셰이크를 함께 곁들여 2만원.

이 햄버거를 만든 스테파노 디 살보 셰프는 뿌듯한 표정으로 고객들을 바라봤다. 이미 그의 이름은 지난여름 한차례 외식업계에서 회자됐다. 고급 샴페인 돔 페리뇽을 결들인 ‘돔 페리뇽 빙수’(2인 기준 7만5000원)를 만든 게 그다. 서민적인 한국의 빙수에 ‘고급’을 얹은 것처럼 그는 패스트푸드인 햄버거에도 ‘럭셔리’를 달았다.

그런데 이날 참석한 김덕승 부총지배인은 맛보다 “딜리버리”(배달)를 강조했다. 그는 “호텔은 찾아오기에 부담이 되고, 호텔 음식도 벽이 있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며 “‘우리가 고객을 찾아가보자’라는 생각으로 배달 서비스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케이크나 쿠키 등을 배달하는 호텔은 있었지만,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음식을 배달하는 호텔은 이곳이 처음이다. 김 부총지배인은 “최근 수제버거가 인기인데다, 한 끼를 먹어도 ‘웰빙’을 따지는 고객이 있다는 점”이 배달 서비스를 결정한 배경이라고 덧붙였다.

배달 서비스는 10월 중순 시작된다. 배달전문업체 ‘푸드플라이’나 업장으로 전화해 주문하면 된다. 일단 호텔이 위치한 동대문역을 기준으로 반경 5㎞ 선까지인데, 교통이 편리한 서울의 장점을 고려해 차츰 배달 지역을 늘릴 계획도 있다.

호텔의 음식 배달은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보기 드문 서비스다. 외국 호텔과 달리 한국 호텔은 룸 판매보다 면세점, 식음료 등에서 수익을 내야 하는 데, 햄버거 배달은 한국 호텔의 이런 치열한 경쟁 때문에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넘사벽’ 이미지 깨고
전례없는 파격 실험 중
외국서도 보기 드문 사례
전문가들 “치열한 경쟁 탓”

‘비엘티(BLT)스테이크’에서 파는 ‘어니언 링’. 배달서비스 품목은 아니지만 레스토랑의 인기 메뉴다.
‘비엘티(BLT)스테이크’에서 파는 ‘어니언 링’. 배달서비스 품목은 아니지만 레스토랑의 인기 메뉴다.

맛 골목,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 입성

소월로는 남대문과 남산의 동쪽 일대를 아우르는, 서울 중구의 고즈넉한 길이다. 이 길에는 맛집이 넘쳐난다. 경리단길, 해방촌 등 이미 유명해진 맛 골목도 인근에 포진해 있다. 20~30대 식도락가들은 맛 골목을 찾아 데이트와 주말 나들이를 즐긴다.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지하 1층에 걸린 주소 표지판.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지하 1층에 걸린 주소 표지판.
지난 22일 찾은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지하 1층에는 ‘소월로 322’ 표지판이 떡하니 걸려 있었다. 소월로 322는 이 호텔의 주소다. 고급 호텔 지하에 난데없는 주소 표지판이라니, 어찌된 일일까? 그랜드 하얏트 서울은 호텔 지하 1층에 골목을 만들어 레스토랑과 꽃집 등을 배치하는 프로젝트 ‘322 소월로’를 진행하고 있다. 1978년부터 운영해온 180석의 일식당 ‘아카사카’를 부수고, 그 자리에 레스토랑 4개와 꽃집을 넣는다. 초밥 전문점인 ‘카우리’, 국내에서 처음으로 숯불 오븐을 비치한 ‘스테이크 하우스’, 철판요리 전문점인 ‘데판’, 꼬치구이 전문점인 ‘덴카이’와 꽃집 ‘피오리’가 들어선다. 맛 골목이 고급 호텔 지하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해 주소 표지판을 들머리에 붙였다. ‘322 소월로’는 현재 90% 이상 완공된 상태로 10월 중순 정식 개장한다.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레스토랑 ‘데판’. 이희준 요리사가 철판에서 조리를 하고 있다.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레스토랑 ‘데판’. 이희준 요리사가 철판에서 조리를 하고 있다.

‘데판’의 토마토, 잣 등의 구이.
‘데판’의 토마토, 잣 등의 구이.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그랜드 하얏트 아시아·태평양 식음운영전략 부사장 안드레아스 슈탈더는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식문화가 발달하고 변화하는 역동적인 나라다. 외국의 다양한 요리와 문화를 경험한 셰프들이 국내 시장에서 빠르게 외국 음식을 토착화하고 있다”며 “기존의 큰 규모와 무거운 격식의 호텔 레스토랑 대신 편안한 분위기에서 부담없이 맛을 즐길 수 있는 ‘골목’의 느낌을 들여왔다”고 말했다. 작은 공간에서 셰프와 고객이 가까이 소통하면서 즐기는 최근의 식문화 변화를 호텔 안에서도 구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골목의 레스토랑들도 모두 ‘오픈 키친’이다. 레스토랑 직원들의 명함에 호텔명도 적지 않았다. 음식 가격도 과거보다 15~20% 정도 내린다고 한다.

이날 철판요리전문점 ‘데판’에선 메뉴시식회가 열렸다. 자리에 앉자 귀가 먼저 즐거웠다. 창창! 달군 불판에서 칼이 춤췄다. 눈만 감으면 어린아이들의 칼싸움 놀이터에 온 듯한 착각이 든다. 이희준 셰프는 차분한 손놀림으로 요리를 했다. 잣과 토마토, 바다생물 바닷가재, 메로, 한우에 불 맛이 입혀졌다. 300℃ 고열을 견딜 수 있는 특수필름에 싸서 철판에서 익힌 메로는 겉은 살짝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지만 씹는 맛이 살아 있다. 두런두런 조리법과 식재료에 대해 묻고 답하는 동안 옅은 우정이 피어올랐다. 그는 “철판요리는 일본이 원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본래 유럽에서 시작됐다. 몽골 군인들이 유럽으로 원정을 가 방패에 음식을 익혀 먹으면서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이 조리법은 중식에도 영향을 미쳤고, 일본에서 지금처럼 대중화됐다. 자세한 식재료 설명을 곁들인 조리 시연이 펼쳐지니 음식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음식을 통한 교감은 코와 혀까지 즐겁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골목에는 향기로운 꽃향이 퍼져 있었다. 아늑한 골목의 정취가 느껴졌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겉은 살짝 바삭하고 속은 씹은 맛이 살아있는 ‘데판’의 메로구이.
겉은 살짝 바삭하고 속은 씹은 맛이 살아있는 ‘데판’의 메로구이.
‘데판’의 파인애플 디저트. 흑후추를 뿌린 후 철판에서 굽는다.
‘데판’의 파인애플 디저트. 흑후추를 뿌린 후 철판에서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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