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랑찰랑, 백포도주의 천국…미국 와인의 심장부 나파밸리

끼니 2018.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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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캘리포니아 화재에도 살아남은 와이너리
주인 철학 담아 소량 생산하는 부티크 양조장들
구대륙 양조법 받아들여 꽃 핀 곳도 있어
친환경 농법이 대부분···시음장도 아름다워

와이너리 키슬러.
와이너리 키슬러.

행복해지는 법은 뭘까?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여행을 떠나라고 권한다. 우리는 낯선 여행지에서 호기심을 채우기도 하고 깊이 침잠해 있던 자신의 다른 면을 만나 놀라기도 한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야말로 마음의 힘을 키우는 특효약이다. 한국관광공사가 지난 4월에 발표한 한국 관광통계에 따르면 해외여행객 수는 지난해에 견줘 11.3%나 증가했다고 한다. 여행의 트렌드도 바뀌고 있다. 유명 여행지보단 내면의 지평을 넓혀줄 체험을 찾아 떠나는 이가 많아졌다. 미식 투어가 대표적이다. 최근엔 와이너리를 찾는 이들도 많다. 와인의 고향에서 맛보는 미식은 오랫동안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자연적인 방식으로 생산하는 와인을 좋아해. 캘리포니아 샤르도네는 인공적인 맛이야. (그래서 좋아하지 않아)” 와인 애호가에겐 교과서 같은 영화 <사이드웨이>에서 주인공 마일즈는 결혼을 앞둔 친구 잭과 떠난 와이너리 여행에서 캘리포니아 와인을 깎아내린다. 지난 4월30일께 6일간의 일정으로. 마치 마일즈가 된 양,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로 떠났다. 전 미국 와인 생산의 70%가 캘리포니아에서 이뤄지고 그 중심에 나파밸리가 있다.

설렘보다는 걱정이 컸다. 캘리포니아 북부에 몰아친 산불이 와인 여행지로 고른 6개 ‘부티크 와이너리’(주인의 철학으로 소량 생산하는 양조장)도 강타했다면 타인의 불행 앞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고민이 됐다. 지난해 10월,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인근 칼리스토가 계곡에서 시작된 산불은 시그나렐로 에스테이트 등 크고 작은 와이너리에 피해를 줬다.

“산불이요? 강 넘어 포도밭 보세요. 우리는 ‘리플렉션 빈야드’(반사 포도밭)라 불러요. 강에서 반사된 태양 빛이 포도밭을 비춰 그 열로 포도가 더 잘 자라요. 지난해 9월, 이미 수확한걸요.”

’크룹 브라더스’의 소믈리에 알마 암브로스가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건네고 있다.
’크룹 브라더스’의 소믈리에 알마 암브로스가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건네고 있다.

첫 여행지 ‘크룹 브라더스’의 소믈리에 알마 암브로스의 설명을 듣고서 안심이 됐다. 크룹 브라더스는 1998년 설립된 와이너리로 주인인 70대인 잰 크룹은 본래 내과 의사였다. 그는 질 좋은 땅보다 황무지에 가까웠던 스테이지코치 와이너리를 사들여 6년간 돌밭을 개간해 지금의 와이너리로 완성했다. 설립 역사가 20년이다. 나파밸리에 포도나무가 정착한 지 150년이 넘었다. 잰은 “의사로 살 때는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와인 농장을 운영하는 건 즐겁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도 그처럼 전통주 양조에 매달리는 은퇴자들이 많은 걸 보면 우아한 노인이 되는 덴 술 만한 게 없나 보다. 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알마는 숙성실로 인도했다. 오크통을 열어 맛을 보게 하고 “샤르도네입니다. ‘수르 라이 에이징’(sur lie ageing) 과정을 거치죠. 효모를 넣어 16개월 더 숙성한 겁니다.” 마일즈가 얘기한 인공적인 샤르도네의 맛이 이런 것일까? 부드럽고 은은한 와인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시음한 이들은 서로 눈을 맞추면서 웃었다.

영화에서 마일즈는 포도품종 피노누아를 예찬한다. “이 지역에선 피노누아가 잘 자라. 태양의 찬 공기가 내려와 포도 알갱이를 차게 하지. 열과 습기에 민감한 알갱이는 섬세한 와인으로 탄생해”라고 말이다. 와이너리 ‘하이드 드 빌렌’에서 만난 피노누아 와인은 그의 평에 딱 맞는 맛을 자랑했다. 와인 ‘하이드 드 빌렌 이그나시아 피노누아 2013’은 맑은 샘물 같으면서도, 비빔밥의 빨간 양념이 조금 올라간 것처럼 묵직한 풍미가 살짝 돌아 행복을 전했다. 숙성실에 있는 달걀 모양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눈에 띄었다. 제임스 아이어 수석 와인메이커는 “소량의 샤르도네를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숙성시키는 데 쓰는 통”이라고 설명했다. 1년에 5만개 이하로 적은 양의 와인만을 생산하는 이 와이너리는 독특한 역사를 가졌다. 한 병당 수천만원에 달해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으로 꼽히는 ‘로마네 콩티’를 생산하는 프랑스의 드 빌렌 가문과 나파밸리의 하이드 가문의 결혼으로 만들어진 와이너리다. 드 빌렌 가문의 오베르가 하이드 가문의 파멜라와 결혼한 후 이 지역을 방문했다가 와인 생산을 권유한 게 시작이었다. 역사가 깊은 구대륙의 와인 제조법과 신대륙인 미국의 포도가 만나 세상의 빛을 본 이 와이너리의 와인은 바디감이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고 우아하다. 피니시(잔향)가 길게 남아 미뢰(미각세포)를 깨운다. 마일즈가 이곳에서 샤르도네 맛을 봤다면 더는 폄하하진 못했을 것이다. 부티크 와이너리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제임스는 “친환경 농업은 기본”이라고 했다.

4월의 나파밸리는 포도송이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4월의 나파밸리는 포도송이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하이드 드 빌렌’의 와인들.
’하이드 드 빌렌’의 와인들.

미국 와인은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와인 종주국인 프랑스나 이탈리아로부터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마케팅에만 열을 올릴 뿐 실제 맛의 향상엔 열정이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로버트 몬다비 같은 와인사의 걸출한 인사들이 배출되었음에도 여전했던 구대륙의 시선은 1976년 바뀌게 된다. 파리에서 열린 프랑스 와인과 나파밸리 와인의 ‘블라인드 테이스팅’(라벨 등을 가리고 맛을 보는 것) 행사에서였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나파밸리의 와인이 1등으로 뽑힌 것이다. 와인 전문가들은 이날의 일을 ‘파리의 심판’이라고 부른다.

‘파리의 심판’은 현재진행형이다. 2003년에 설립된 와이너리 파비아의 와인은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에게 97점을 받는 등, 성과를 이어가고 있다. 파비아의 주인인 애니 파비와와 앤디 에릭슨 부부가 우아한 둥근 모서리를 갖춘 우윳빛 세면대와 빈티지풍의 식탁 등을 갖춘 시음장으로 안내했다. 와이너리 투어의 재미엔 주인의 독특한 감성과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시음장이 있다. 건축적인 면에서도 칭찬받을 만한 곳들이 많은 데다가, 드넓고 아름다운 포도밭이 곁에 있어 다른 여행지와는 다른 감상을 선사한다. 더구나 파비아의 건물은 1886년 이탈리아 농부가 만든 농장을 이들 부부가 인수해 수리한 것으로, 구대륙과 신대륙의 아름다움이 곳곳에 박혀 있다. 애니 파비아는 “와인에 첨가물을 일절 넣지 않고 정제하거나 여과하는 과정도 거치지 않는다”며 “땅이 지닌 힘이 와인에 전해지도록 노력”한다고 한다.

’파비아’의 주인 앤디 에릭슨이 와인을 시음하고 있다.
’파비아’의 주인 앤디 에릭슨이 와인을 시음하고 있다.

와이너리 ’파비아’의 시음장.
와이너리 ’파비아’의 시음장.

와인 라벨도 와인 마니아에겐 와인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와이너리 ‘아뮤즈 부셰’는 로버트 파커가 ‘나파밸리의 여왕’이라고 칭송한 하이디 배럿이 만든 양조장이다. 25살에 처음 양조를 시작했을 만큼 와인에 애정이 많은 그는 와인 경매 행사에서 고가로 낙찰되는 와인이나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에 가까운 평가를 받은 와인을 생산하는 등 실력을 인정받아 현재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됐다. 그는 당대의 가장 촉망받는 예술가에게 라벨 제작을 의뢰하고 시음장에서 전시를 한다.

다섯 번째로 찾아간 와이너리는 키슬러. 라벨의 글자가 어쩐지 익숙해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이드웨이>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마일즈를 맘에 두고 있는 마야는 와인 양조를 공부하는 이다. 마야의 친구 스테파니에게 연정을 품은 친구 잭이 마련한 술자리에서 와인 여러 병이 오간다. 그중에 키슬러가 있었다. 여전히 전 부인에게 미련을 못 버린 마일즈는 키슬러를 벌컥벌컥 마시고 ‘음주 전화’를 하러 뛰쳐나간다. 인생의 돌발변수는 이렇게 러시아 레닌광장의 붉은 기보다 더 빨간 와인이 ‘스모킹 건’이 돼서 터진다.

와이너리 ’키슬러’의 시음장.
와이너리 ’키슬러’의 시음장.

와이너리 ’키슬러’의 시음장.
와이너리 ’키슬러’의 시음장.

와이너리 ’아뮤즈 부셰’의 야외 시음장.
와이너리 ’아뮤즈 부셰’의 야외 시음장.

와이너리 ’아뮤즈 부셰’. 당대 아티스트에게 라벨 디자인을 맡겨 제작한다. 제작된 라벨은 원화는 전시한다.
와이너리 ’아뮤즈 부셰’. 당대 아티스트에게 라벨 디자인을 맡겨 제작한다. 제작된 라벨은 원화는 전시한다.

찾아간 곳은 키슬러의 시음장 중 한 곳인 ‘트렌톤 로드 하우스’였다. 1978년에 설립된 키슬러는 시음장도 고색창연하다. 100년이 넘은 헛간을 개조해 만든 시음장이다. 소믈리에 애슐리 벤더는 “정통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양조 방식을 캘리포니아에서 최초로 선보인 곳이 우리”라면서 “인위적인 정제나 여과 과정을 배제하고 자연적인 양조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고 한다. 애슐리가 자랑스럽게 건넨 건 샤르도네 와인이었다. <신의 물방울>식 표현을 빌자면 ‘귀향하는 연어의 보드라운 살결이 다 비치는 맑은 물의 청량함이 살살 인사하는’ 맛이다.

와이너리 ’월터 핸젤’.
와이너리 ’월터 핸젤’.

마지막 여행지인 와이너리 ‘월터 핸젤’은 캘리포니아의 대표 자동차 판매 회사 ‘핸젤 오토’의 창업주 아들인 스테판 핸젤이 운영한다. 부자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했던가. 다른 나파밸리의 와인과 비교해 가성비가 높다는 평이다.

와이너리 투어의 재미 중 하나는 산지에서 직접 맛을 본 와인을 구매하는 것이다. 와이너리에서 산 6병을 챙기면서 한국에서 아끼는 이들과 마실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결국 마일즈는 아껴두었던 프랑스 와인 ‘1961년산 슈발 블랑’을 햄버거 가게에서 홀로 다 마시고 나파밸리에서 와인 양조를 시작할 마야를 찾아가는 거로 끝난다. 프랑스 와인을 버리고 나파밸리를 선택하고야 말았다.


나파밸리(미국)/박미향 기자 mh@hani.co.kr, 사진 씨에스알와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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