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 더 공부해야 한다”

박미향 200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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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진가들] 흑백사진을 고집하는 민병헌 작가


이름 뒤에 늘 극찬을 몰고 다니는 그의 ‘별 거 아닌 풍경’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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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cm x 125cm(세로x가로)의 큰 사진이 있다. 온통 하얗다. 무엇이 사진 속에서 살아 숨쉬는지 알 수가 없다. 보는 이는 더 가까이 다가간다. 뚫어져라 본다. 이윽고 발견한 것은 사진 한쪽을 차지한 작은 집과 언덕과 구름이다. 비로소 감탄사가 터진다.

 

사진을 한번도 제대로 공부한 적 없어


작가 민병헌(52)의 사진은 이처럼 여백과 흑백의 수많은 톤으로 무장한 여리지만 강한 사진이다. 현존하는 한국의 사진가 중에 국외 미술관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작가, 발표만 하면 작품들이 금세 눈 높은 수집가들 손으로 팔리는 작가, 대중의 사랑과 평론가의 애정을 한몸에 받는 작가, 민병헌. 그의 이름 뒤에 극찬이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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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화려한 이력만 본다면 슬프고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나 싶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이 가난을 파먹고 살았듯이 그 역시 젊은날 대부분이 가난했고 우울했다.

 

그는 사진을 전공한 적도 사진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적도 없다. 그저 사진을 찍고 암실에서 틀어박히는 것이 좋았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라서 암실에서 혼자 몇 시간 동안 흑백사진을 만드는 것이 좋았다. 깜깜한 곳에 혼자 있는 느낌, 그 안에서는 시간의 개념도 사라졌다. 지금도 역시 ‘암실’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컬러사진의 유혹에도, 디지털 사진의 손짓에도 끄덕없이 흑백사진을 고집하는 이유는 여전히 흑백사진에는 공부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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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생인 그는 한번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다. 대학도 그저 친한 친구를 따라 전자공학과를 갔지만 그마저도 졸업하지 않았다. 우연히 만지게 된 카메라를 메고 서른이 넘을 때까지 밥벌이 한번 폼 나게 못했다. 그저 찍고 암실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은사이자 사진작가인 홍순태를 만나면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작가 홍순태는 그에게 흑백 프린트의 색다른 느낌들을 전달했다. “선생님께 감사하는 것은 한번도 자신의 작품세계를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덕분에 나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4 copy.jpg1987년, 어렵게 연 두번째 사진전 ‘별거 아닌 풍경’전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당시는 외국에서 공부한 유학파가 실력을 발휘하고, ‘메이킹 포토’(만든 사진) 같은 사진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그저 스트레이트 사진을 찍고 우직하게 아무런 조작 없이 흑백프린트를 하던 그에게 세상은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불편한 세상은 그야말로 ‘별거 아닌 풍경’을 보고 그만의 독특한 ‘눈’을 발견했다. 뒤이어 ‘잡초’, ‘안개’, ‘몸’시리즈들이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2005년에 발표한 스노 랜드(snow land) 연작은 엘에이 카운티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모마, 휴스턴 미술관 등에 소장되는 등 그 인기가 프랑스·미국·영국 등으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부담스럽단다.

 

“요즘 나도 모르는 사이 책임질 일들과 역할이 생기고 있다. 가능하다면 무책임하고 철없이 살고 싶다. 작업은 내게 재미다. 재미가 없어지면 안 할 것이다.”


절제되어 더 유혹적인 흑백의 계조

 

5 copy.jpg그의 사진은 자신이 집착하는 ‘재미’만큼 독특한 ‘재미’를 준다. 콘트라스트는 약하고 밋밋한 빛들이 온통 인화지를 차지하지만 자세히 보면 은은한 욕망이 흑과 백으로 찍혔다. 절제되어 더 유혹적이다. 구석구석까지 다양한 흑백의 계조가 빛난다.

 

그는 보는 이에게 ‘자신’을 강요하지 않는다. 같은 사진이라도 사람에 따라 슬플 수도 기쁠 수도 있다. 그의 사진에 구체적인 이름을 달지 않은 이유다.

 

“사람의 얼굴이 모두 다르듯 마음의 생김새도 다르다. 안 찍힌 것을 찍으려 하지 말고 자신이 편한 대상을 찍으라. 마음에 따라 사진은 다르다. 자신의 색깔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후학들에게 던지는 한마디다.

 

“어려웠을 때 그저 밥이나 사 먹으라고 내 사진을 사 준 이들에게 죽을 때까지 ‘여전히 열심히 하고 있구나’란 소리 듣고 싶다!” 그의 간절한 소망이다.

 

박미향 한겨레 맛전문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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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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