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에 추억 비비면 옛사랑 윤기 ‘자르르’

박미향 2009.04.23
조회수 23161 추천수 0
[맛있는 만화] ‘심야식당’의 ‘버터라이스’
찰진 쌀밥, 노란 버터에 간장 몇 방울, 순정한 맛
능글거리면서도 밉지않은 순한 ‘바람둥이’ 유혹
 
 
박미향-버터라이스완성-1(온 copy.jpg

부리나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달려갔는데, 엄마는 없고,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만 들린다. 어찌할 바 몰라 멍하게 있는데 창 밖에서 장대비가 쏟아진다. 눈물이 뚝뚝 운동화 아래로 떨어지고 내 작은 가슴에 서러움이 박힌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급한(?) 일은 허기진 배다. 이때 누이가 가르쳐준 요리법을 퍼뜩 생각해내고 부엌으로 달려간다. 흰밥을 푹 푸고 달걀의 노른자만 밥에 얹어 엄마가 만든 간장을 쪼르륵 부어 쓱싹쓱싹 비빈다. ‘꺼~억’, 위장에서부터 올라오면 행복한 기분이 조금씩 온 몸에 퍼진다.
 
어린 시절 엄마가 없는 빈집에 대한 짧은 추억은 누구나에게 있다. 지금도 달걀의 노른자만 보면 그 시절이 떠오른다. 지난날 먹을거리에 담긴 ‘추억’은 묘지까지 가져가는 법이다.
 
고급 식당 운운하던 음식평론가도 출석 도장 ‘꽝’
 
 요리만화 <심야식당> 3권(아베 야로 저)에 등장하는 ‘버터라이스’에도 그런 추억이 있다. 우리네 노른자 비빔밥과 매우 닮은 음식, ‘버터라이스.’ 만화 속에 등장하는 꼬장꼬장한 평론가는 이 소박한 음식 때문에 어린 시절 미각을 찾는다. 
 
‘버터라이스’편은 한 단골손님이 음식평론가 마사오와 함께 식당 문을 여는 데서 시작한다. 음식평론가는 앉자마자 “거기는 굴의 ‘프리트아 라 뷔르로와’가 자랑인가 본데, 소스에 깊은 맛이 없어”, “다음에 내가 잘 가는 고급 가게에서 ‘브리누이’를 먹게 해줄게” 등등 알아듣기 힘든 말로 식당 안 사람들의 기를 죽인다.
 
일본 여행을 한 이라면 짐작하겠지만 일본의 소박한 식당들은 자리가 좁다. 옆 자리에 앉은 낯선 이가 가족처럼 가깝다. 이때 신주쿠에서 노래하는 떠돌이 악사 고로씨가 기타를 메고 등장한다. 그가 냉큼 주문하는 음식은 버터라이스. 주인장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버터라이스를 대령하자 고로씨는 희한한 방법으로 먹는다. 그는 30초 뜸을 들이고 작은 버터를 넣은 후, 녹으면 간장을 가볍게 뿌려 먹는다. 그가 짓는 행복한 표정 때문에 금세 식당 안 여기저기서 ‘저도 주세요’라는 소리가 울린다. 배를 두둑하게 채운 고로씨는 노래를 부른다. ‘하코다테의  여자’. 이 노래가 밥값이다. 그날 이후로 음식평론가는 매일 이곳을 찾아 버터라이스를 먹는다.
 
왜? 어린 시절 추억 때문이다. 고로씨 노래에 등장하는 하코다테의 여인은 음식평론가 마사오의 누이 라츠코다. 어릴 때 세 사람은 버터라이스를 자주 먹곤 했다. 버터라이스가 순수했던 어린 시절 마사오의 미각을 찾아주었다. 그 덕에 고로씨는 옛 사랑 라츠코를 다시 만나 노년의 사랑을 시작한다. 만화의 결말이다. 따끈한 국물처럼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해피엔딩이다. 버터라이스는 엄청난 요리의 기교가 들어가지 않는다. 미슐랭 가이드에 등장하는 산해진미처럼 별점으로 치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음식보다 사람들 마음을 활짝 열어주는 힘이 있다. 이런 요리가 최고로 맛나다.
 
구수한 된장국은 버터라이스와 ‘절친’
 
박미향-버터라이스완성(온) copy.jpg일본에서 10년 넘게 살면서 수 백 개의 맛난 집을 순례한 김종섭(48. 라멘집 <아지모토> 운영)씨의 손맛을 빌려 ‘버터라이스’를 만들었다. 요리 과정은 간단하다. 그래서 맛의 비결은 좋은 재료에 있다. 특히 쌀은 중요하다. 햅쌀이나 질이 좋은 쌀로 지어야한다. 김씨는 “오래 저장한 쌀은 쉽게 부서지고 찰기가 없다고”말한다. 그래서 적당하지 않다.
 
쌀 원산지를 우리나라로 알고 있는 이가 있는데 아니다. 벵골만의 오지인 갠지스 강과 부라마푸트라 강이 이루는 삼각주라는 설과 중국의 운남성에서 인도의 아샘 지방에 걸치는 열대나 아열대의 고원 지역이라는 설이 있다. 우리나라는 신석기시대부터 기장, 피, 조, 수수 등을 먹은 기록이 있는데, 쌀은 그 이후 부족국가 시대부터 먹었다고 알려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쌀 생산량이 크게 늘었지만 일반 백성들까지 넉넉하게 먹기에는 부족했다. 예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 짓는 솜씨가 좋았다. 밥알에 윤기가 흐르고 고루 익어 기름졌다. 우리나라 쌀 명산지는 시흥, 김포, 예산, 합덕, 정읍, 고창 등지다. 주로 조상들은 돌솥에서 밥을 지었다. <규합총서>(1809년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가 부녀자를 위하여 엮은 일종의 여성생활백과)에 ‘밥과 죽은 돌솥이 으뜸이요, 오지탕관이 그 다음이다’ 적혀 있다. 쌀은 수분이 15%인데 밥을 지으면 65%로 는다. 곡식과 채소가 육식보다 두뇌발달에 좋다는 보고서가 있다. 김종섭씨는 “밥을 지을 때 물도 중요하다. 산에서 약수나 암반수를 구해서 짓는 이들도 있다”고 말한다.
 
‘버터라이스’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식재료는 버터다. 대부분의 버터는 노란색이지만 최상품 버터는 흰색이 돈다. 하지만 ‘버터라이스’ 맛에 큰 영향은 없다. 마지막으로 뿌려먹는 간장은 화룡점정처럼 중요하다. 김종섭씨가 알려주는 맛 간장은 물과 진간장의 비율을 0.5:1로 섞어 물이 1/3정도 될 때까지 조린다. 다시마조각이나 대추, 대파, 새우 등을 함께 넣어 조려도 맛있다. 만화에서 주인장은 돼지고기 된장국을 식탁에 같이 낸다. 벨벳 천처럼 부드러운 버터라이스와 구수한 된장국은 잘 어울린다.
 
버터라이스는 밉지 않은 바람둥이 사내를 닮았다. 어딘가 능글거리는 구석은 있지만 속내가 순해서 (혀의) 경계심이 금세 사라진다. 짧은 시간 둘도 없는 연인이 된다. 자르르 흐르는 밥알의 윤기, 사람을 유혹하는 고소한 향. 버터는 밥을 더욱 기름진 땅으로 만든다. 버터라이스를 먹으면 우리 안에 비옥한 대지가 자리 잡고 씹을수록 그 농도는 진해진다.
 
오늘 누군가에게 바람둥이 ‘버터라이스’는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줄지 모른다. 세월이 지나 고로씨의 ‘하코다테 여인’을 찾아 준 것처럼. 세상은 그래서 살 만하다.
 
■ 버터라이스
 
<재료> 쌀 2컵(1컵 2200cc), 물 3.5컵, 버터 60그램, 양파, 100그램, 햄 조금
 
Untitled-3 copy.jpg
 
<만들기>
1. 쌀은 씻어서 채반에 물기를 빼고 말려둔다.
2. 잘게 썬 양파, 햄과 버터를 냄비에 넣고 볶는다.
3. 쌀을 냄비에 넣고 노릇해질 때까지 볶다가 물을 붓는다.
4. 끓으면 중불로 낮춰 7~8분 더 끓이다가 약한 불로 낮춘 후에 15분 더 끓인다.
5. 뚜껑을 닫고 5분간 뜸을 들인다.
 
■ 일본식 된장국

Untitled-1 copy 3.jpg
<재료>

 
물 3컵, 두부 1/3모, 건새우, 다시마, 버섯, 미역 조각, 일본 된장
 
<만들기>
 
1. 물과 건새우, 다시마를 넣고 7~8분 끓인다. 우린 후에 건새우 등은 건져낸다.
 
2. 두부는 1x1cm 크기로 자른다.
 
3. 1의 우린 물에 미역을 잘게 썰어 넣고 끓인다.
 
4. 3이 끓으면 된장을 풀고 마지막에 두부와 버섯을 넣는다.
 글 사진 박미향 <한겨레> 맛담당 기자. mh@hani.co.kr
 요리 김종섭(일본 라멘집 <아지모토>운영)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첨부
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이메일 : mh@hani.co.kr       트위터 : psolsol      

최신글

엮인글 :
http://kkini.hani.co.kr/5111/78a/trackback
List of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