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그룹 출신이 주인장…와인은 되레 소품
이서진 김정은 데이트한 곳…이승철도 들러
문득 길을 걷다 음악이 듣고 싶을 때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엠피쓰리도 없고, 거리의 레코드가게도 조용하다면?
두리번거리면서 공중전화를 찾는다. 핸드폰이 발명된 이후 백 만년만큼이나 긴 시간동안 지갑에 내팽겨쳐져 있었던 전화카드를 커내서 전화를 건다. 어디에? 내 핸드폰에.
컬러링이 들린다. "길을 지나는 어떤 낯선 이의 모습 속에도/바람을 타고 쓸쓸히 춤추는 저 낙엽 위에도/뺨을 스치는 어느 저녁의 그 공기 속에도/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 네가 있어/그래/어떤가요." 남성 그룹 넬의 '기억을 걷는 시간'이다. 종종 하는 짓이다. 툭툭 돈 떨어지는 소리만큼이나 내 귀와 가슴은 음악이 주는 감동 때문에 쿵쾅거린다. 그런 이유로 컬러링은 항상 그맘때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을 골라놓는다. 넬의 노래를 안 지는 얼마 안됐지만 들을수록 중독성이 있다. 서태지가 음반제작에 참여해서 더욱 화제가 되었던 뮤지션이다.
홀딱 빠져 일주일에 수십 만~수백 만원씩 먹다 아예 술집 차려
음악의 중독성은 한번 빠지면 꽤 깊다. 감성을 마구 휘젓는다. 죽을 만큼 슬프게 만들기도 하고 갑자기 여행가방을 챙기게도 한다.
방배동 서래마을에 있는 와인집 <피노>는 그 음악의 중독성 때문에 발걸음을 하는 곳이다. 이 집에서 와인은 그저 소품이다. 주인 이두헌(44)씨는 "이곳은 음악이 70%, 와인은 30%다"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주인 이씨의 과거 이력을 보면 금세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씨는 십여년 전 청춘들의 가슴에 불을 확 지른 노래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을 부른 80년대 인기그룹 '다섯 손가락'의 멤버이다.
음악쟁이가 와인에 빠진 사연이 궁금하다. "일주일에 수십 만원, 수백 만원씩 먹었다. 먹을수록 신기한 것이 모든 와인은 그 맛이 다 다르더라. 그 매력에 홀딱 빠졌다"고 사연을 말한다. 1993년 한국에서 음악활동을 잠시 접고 미국 버클리음악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2000년 귀국해서 뮤지컬 등 다양한 음악 활동을 했다.
"할아버지가 이북에서 양조장을 하셨다. 그래서인지 술을 좋아하는 편인데 주로 독주를 마셨다. 몸이 축나더라. 술은 여전히 좋고." 그런 이유로 알코올 도수가 독주보다 조금 낮은 와인을 알게 되었단다.
와인을 심각하게 많이(?) 즐기다보니 차라리 와인집을 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피노>의 와인은 바로 그 주인장의 입맛대로 구성되어 있다.
가격은 5만원부터…두 달에 한 번씩 새 차림
프랑스 와인은 보르도와 부르고뉴, 론 지역을 구분해서 준비되어 있지만 다른 곳은 나라별로 준비되어 있다. 구대륙, 신대륙 와인이 골고루 차림표에 올라 있다. 두 달에 한 번씩 와인 목록은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가격은 5만원부터다. 소비자가격 4만원인 칠레와인 에스쿠호 로호가 6만원이다.
하지만 달콤한 와인 한 줄기보다 더 달짝지근한 음악 한 소절이 있다. '연주'가 있는 집들은 어떤 먹을거리집이든 '노래비'를 받는다. 적게는 몇 천원이지만 많게는 몇 만원이 넘기도 한다. 한 잔의 와인을 마시면서 공연비를 내는 것이다.
이곳의 연주프로그램은 주인 이씨가 짠다. 매주 화요일 오후 9시와 10시는 이씨가 연주를 하고 다른 날들은 재즈뮤지션, 클래식 연주자들 등이 노래한다.
공연무대 밖 어둑한 곳곳의 테이블을 눈여겨보면 텔레비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인사들이 종종 눈에 띄기도 한다. 이승철 같은 가수들이나 배우들이다. 한때 이서진과 김정은이 이곳에서 데이트를 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묵직한 풀 바디에 붉다 못해 검은 빛이 도는 와인을 내 앞에 끌어당겨 입술을 적신다. 몇 모금 목젖을 타고 쪼르륵 내장으로 흘러 들어가면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이 비를 맞아 해갈되는 것처럼 기쁘다. 고개가 45도로 기울어지고 오른쪽 손이 턱을 받친다. 몽롱해지는 공기를 따라 저만치 무대 위에서 주인 이씨의 연주소리가 나를 찾아온다. 반갑다. 와인 향에 춤추고 음악 색에 어깨가 들썩인다.
<피노>를 나서는 길에 살짝 비틀거리는 어깨를 곧추세우고 다시 공중전화를 찾는다. "그대 어떤가요, 그대 당신도 나와 같나요." 넬이 집으로 인도한다.
글·사진 박미향 <한겨레> 맛전문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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