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처럼 사랑을 마셨고 가게를 낳았다

박미향 2008.09.22
조회수 5456 추천수 0
사이드웨이
 
고독 중독에 빠졌던 프 방랑객 ‘연정 중독’
프랑스 와인 중 국내 낯선 개성 강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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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가고 싶을 때가 있다. 세상살이 소소한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봇짐 하나 달랑 메고 외롭고 쓸쓸한 검객이 되어 발가락 사이로 모래바람 팍팍 묻히면서 떠돌고 싶을 때가 있다. <신용문객잔>(중국 무협영화)의 무림고수가 한없이 부럽고 <셰인>(서부영화)의 주인공이 나였으면 한다.
 
가야 할 곳도 오라는 사람도 없는 철저한 자유가 고독을 선사한다. 고독이 고통스럽기만 할 듯하지만 오히려 친구가 되어 칼에 베인 듯한 서늘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피부 세포를 발딱 세우는 그 알싸한 느낌은 마리화나보다 큰 중독성을 가졌다. 
 
와인과 음식 함께 즐기다 마침내 부부의 연
 
와인바 <사이드웨이>의 주인 안토니 듀포(36)는 그 중독성에 빠졌던 프랑스 방랑객이었다.
 
프랑스 <TF1> 방송에서 음식관련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그는 6년 전부터 베이징, 서울, 도쿄 등을 오가며 마음 닿는 대로 살았다. <TF1> 아시아특파원이라는 직함은 있었으나 세 도시 중 그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않았다. 지금 그는 강남대로 뒤편 한 조촐한 '갓길(사이드웨이)'에서 와인을 홀짝인다.
 
와인을 좋아하는 이라면 영화 <사이드웨이>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소심한 한 남자가 와이너리를 여행하면서 사랑과 인생의 활기를 찾는 이야기다.
 
넓은 와이너리가 꽉 막힌 도시의 숨통을 터준다. 주인공 마일즈가 눈을 감고 와인의 향과 맛을 음미하는 모습은 기쁨의 절정에 도달한 이의 표정이다. 화면을 천천히 돌려 등장하는 와인들을 눈여겨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공부가 저절로 된다. 와인은 마일즈의 좋은 친구가 되어 사랑을 찾아 준다. 수줍은 듯 머뭇거리는 마일즈를 용기백배한 청년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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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포 역시 마일즈처럼 이 땅에서 와인 잔을 앞에 두고 사랑을 찾았다. 그가 더 이상 아시아 세 도시를 방랑하지 않고 <사이드웨이>에서 와인을 홀짝이는 이유다. 그의 아내 김은영(33)씨는 프랑스계 화장품회사 로레알에서 마케팅 업무를 했던 재원이다. 영어까지 3개 국어에 능통한 그는 듀포가 아시아에 대한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 처음 만났다. 그저 친구처럼 와인과 음식에 대해 함께 즐기다가 연인 사이가 되었고 이제는 부부의 연을 맺은 상태다. <사이드웨이>는 그 둘이 만든 결실 가운데 하나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두 사람은 <사이드웨이>를 예쁘게 훌륭한 곳으로 키울 것이다.
 
영화를 좋아해서 <사이드웨이>라고 이름 붙였느냐는 질문에 듀포는 "와인바가 갓길에 있어 이름을 '사이드웨이'라고 짓기도 했지만 많이 알려진 와인보다는 잘 모르는, 작은 와이너리의 와인을 소개하고 싶어서" 지은 이름이라고 듀포는 말한다.
 
입안에서 구비칠 때마다 가슴이 쿵쿵
 
Untitled-3 copy.jpg그가 전하고 싶은 와인은 프랑스 와인 중에서도 개성이 강한 것들이다.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친구도 많아 그 와인들을 가져왔기에 국내 수입업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들이 많다. 그가 불쑥 내민 와인은 누와밸리의 와이너리 필립페 알리에뜨(Philippe Alliet)에서 만든 와인 시농(Chinon)이었다. 미디엄바디, 긴 잔향, 절묘한 균형감, 인위적이지 않은 오크향이 장점이란다.
 
안동 하회마을처럼 혓바늘 사이로 와인이 붉은 물줄기가 되어 돌아나간다. 입안에서 구비칠 때마다 쿵쿵 가슴이 뛰고 몸 안에 핏줄기와 와인이 합쳐진다.
 
이 집 와인 목록의 절반은 프랑스 와인이다. 론, 프로방스 등 프랑스 곳곳의 와인이 골고루 있다. 특히 랑그독 지역의 와인이 눈에 띈다. "요즘 랑그독 지역 와인이 인기가 많습니다. 프랑스의 큰 회사들이 랑그독 지역 와이너리를 사들이고 있다"고 그가 덧붙인다. 
 
그는 음식에도 깊은 조예가 있지만 와인에 관해서도 고향 프랑스에서 전문가에게 2년간 훈련을 받았다. 그가 고른 와인들이 궁금해진다. 
 
방랑에 지치면 그곳에서 봇짐을 잠시 풀어놓으련다. 고독이 주는, 쓰지만 조용한 안락함을 언제 버릴 것인지, 다시 '황야의 무법자'가 되어 길을 나설 것인지 붉은 잔 앞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련다. 
 
글 ·사진 박미향 <한겨레> 맛전문기자 h@hani.co.kr
  

  
  <이용 정보>

  샐러드, 스파게티 등 1만9백원~1만4천5백원.
  
  화이트와인 2만8천원부터.
  프랑스산은 알자스, 보르도, 론 , 랑그독 등 30가지.
  그 외 이태리 스페인 독일, 뉴질랜드 미국, 칠레 아르헨티나 등 15가지.
  로제와인 6가지 4만8천원~5만8천원.
  
  레드와인 2만8천원부터.
  프랑스산은 랑그독, 론 등 120가지.
  그 외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등 150가지.
   
  영업시간: 저녁 5시~새벽 2시. 일요일과 명절은 쉼.
  전화번호: 555-9925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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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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