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첫날 바로 ‘얼간이 클럽’ 멤버가 됐다

이욱정 2011.01.27
조회수 6798 추천수 0


누들로드 이욱정PD의 '르 코르동 블뢰'생존기<2>
150분 동안 온갖 실수에 ‘키친패닉’ 상태 

 
  한 방송국 피디가 있었다. 요리를 좋아했다. 수저를 들 때마다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떨렸다. 2008년 세상의 맛을 향해 카메라를 들었다. 한 알의 밀이 국수가 되어 세계인의 식탁을 주유하는 여행을 따라나섰다. 2년간 10개 나라를 다녔다. 그가 제작한 프로그램은 <인사이트 아시아-누들로드>. 2008년 12월부터 2009년 3월까지 <한국방송>의 전파를 탔다. 피디는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카메라 대신 칼과 도마를 잡았다.  <누들로드>를 만든 이욱정 피디는 지난해 ‘르 코르동 블뢰’ 런던캠퍼스에 입학했다. 요리사를 꿈꾸는 젊은이들과 지글지글, 보글보글 끓는 런던의 주방에서 고군분투중이다. 그의 처절하지만 달콤한 요리학교 생존기가 2주에 한번씩 펼쳐진다. 그의 유학생활을 담은 미니다큐는 www.kbs.co.kr/cook에서 볼 수 있다. - 박미향 기자 mh@hani.co.kr
 
test.png

 
드디어 르 코르동 블뢰(Le Cordon Bleu) 초급과정의 실습시간이 시작됐다. 새로 지급받은 칼 가방의 지퍼가 빡빡한지 중간에 걸려 열리지 않는다. 칼도 못 꺼내고 혼자 낑낑대다가 옆의 여학생을 슬쩍 보니 벌써 셰프 나이프(프렌치 나이프로도 부르는 가장 기본적인 칼)를 꺼내 쓱쓱 갈고 있다. 이미 칼 다루기가 손에 익은 폼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학생은 이미 칼 갈기까지 마치고 그날 쓸 재료들을 능숙한 동작으로 다듬기 시작한다.

 
“지금 나, 초급반 교실에 와 있는 것이 맞아? 아니, 쟤들은 뭔데 왜 이렇게 잘하는 거지?” 사이좋게 같이 헤매면 내 마음이 한결 편하련만 초장부터 불안감이 몰려왔다. 실습이 시작한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주방 안에는 일종의 선두 그룹이 일찌감치 형성되어 있었고 나는 분명 그들 눈에는 안 보일 정도로 뒤처져 있었다. 실습 첫날 내가 처했던 긴박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선 르 코르동 블뢰 신입생들에 대한 배경설명이 잠깐 필요하다.

 
르 코르동 블뢰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대충 A, B, C 3가지 부류로 나뉜다. 그룹 A. 라이선스가 필요해서 들어온 경력자들이다. 학교 문을 두드리기 전에 이미 3~4년 동안 여기저기 레스토랑의 주방을 구르면서 탄탄한 실전경험을 쌓은 이들이다. 조리 실력이 뛰어난데도 비싼 등록금을 내고 요리학교를 들어온 이유는 명문학교 졸업장과 여기서 맺어진 인맥이 필요해서다.(좋은 레스토랑에 취업하는 데 연줄이 중요한 건 서양도 마찬가지다. 아는 셰프의 개인적인 추천 없이 이력서 수백 장 돌려봐야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건 요리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정설이다)

 
헝가리에서 온 아틸라도 그런 경우다. 팔뚝에 호화찬란한 문신에 바짝 깎아 올린 헤어스타일 등 그는 인상부터 터프하다. 어떤 레스토랑의 주방에 가도 한명쯤은 마주칠 만한 전형적인 ‘쿡’이다. 피자 하우스의 견습생에서 시작해서 동네 작은 프랑스 레스토랑의 수셰프(Sous Chef·소규모 주방에서 주방장 바로 아래의 직급)까지 5년 이상 주방 밥을 먹었다. 그가 실습실에서 거침없이 재빠르게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 선생인지 학생인지 분간이 안 간다. 르 코르동 블뢰 신입생 10명 중 3명은 이런 수준이다. 이런 친구들에게 초급과정의 실습 시간은 뭐 가볍게 몸을 푸는 정도, 아니면 신나는 장기자랑 시간이랄까.
 

그룹 A에 초급실습은 가볍게 몸풀기
 
img_03.jpg그룹 B. 취미로 요리를 즐기다 셰프의 꿈을 키워 들어온 학생들이다. 흔히 학생들 사이에서는 커리어 체인저(career changer·전직희망자)라고 부르는데 다른 직업을 갖고 살다가 쿠킹의 묘미에 빠져 하던 일 접고 온 경우다. 신입생 중 절반 정도는 이런 경우인데 인도에서 온 튜사가 그랬다. 붐바이의 잘나가는 컴퓨터 회사를 다니다 요리사가 너무 되고 싶어 다 때려치우고 있는 재산 다 털어 르 코르동 블뢰에 입성했다. 인도 영화배우 샤룩칸을 닮았는데 못하는 인도요리가 없다. 그가 만든 탄두리 치킨은 황홀할 정도로 맛있다. 평생 모니터 앞에 앉아 있기에는 내가 봐도 아까운 재능이다. 이런 친구들은 비록 레스토랑 경력은 없지만 오랜 세월 홈 쿠킹으로 갈고닦은 실력이 만만치 않다. 집에서 혼자 느긋이 요리하던 습관이 있어 제한 시간 안에 여러 명이 어깨를 부딪히며 조리를 해야 하는 실습실 환경이 좀 낯설기는 하지만 이들 대부분의 실력은 세미프로의 수준이라 우왕좌왕하는 법이 없다.

 
마지막 셋째 그룹 C. 이 학생들 성향은 공통으로, 맛집 찾아다니는 것 즐기고 집에 가보면 책장에는 온갖 요리책이 가득하다. 또 몇가지 잘하는 ‘십팔번’ 메뉴가 있어 가족이나 친구들(물론 이들은 공짜손님이다)에게 “맛있다, 식당 한번 해봐라” 하는 칭찬도 몇번 들어본 적 있는 이들이다. (그런 인사치레 부추김을 진짜로 믿고 식당 차렸다 망한 사람 여럿 보았다.) 하지만 그룹 C의 실체는 양파 한 개도 제대로 썰 줄 모르는 완전 초보자들.(학생들이 즐겨 쓰는 표현으로 ‘주방의 얼간이들’(Kitchen Idiots)이다) ‘얼간이들’은 수적으로는 10% 안팎의 소수지만, 특유의 이상행동(예를 들면 잦은 비명 같은) 때문인지 겁에 질린 낯빛 때문인지 프로와 세미프로들이 장악한 실습실에서 바로 눈에 띈다. 애처롭게도 이들은 주방에서 쉽게 패닉 상태(의학용어로 갑작스런 공포와 불안에 의한 심리적 혼란상태를 일컫는데 주방용어로는 굉장히 얼빠진 상태와 동일한 의미)에 빠진다. 이로 인해 때때로 지금 자신의 두 손이 무엇을 조리하고 있는지 뇌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A·B 그룹 멤버들의 동작을 필사적으로 엿보며 오직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으려는 처절한 생존 본능에 의존한 채 수업에 임한다. 스스로 참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마지막 그룹 즉, 얼간이 클럽의 멤버가 되었다.(이런 제길…)
 

더 심한 ‘얼간이’와 실수 덜 하기 선의의 경쟁
 

암튼, 나는 주방 칼로 무장한 검투사들이 우글거리는 콜로세움 한가운데 패대기쳐졌고, 그 틈에서 150분 동안 살아남아 한 접시의 요리를 완성해야 했다. 이때부터 나는 인간이 주방에서 저지를 수 있는 매우 다채로운 실수와 사고를 골고루 체험하게 된다. 그 와중에 나에게 심적 위안이 되어준 친구가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디토였다. 그가 초급과정 내내 나의 심리적 안전망 구실을 해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가지. 나보다 더 심한 얼간이 짓으로 자칫 나에게만 쏟아질 수 있는 선생님의 시선을 적당히 분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실습 첫날, 내가 칼 가방의 지퍼를 겨우 열었던 순간에도, 디토는 여전히 가방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그것도 주방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말이다.(키친 패닉의 전형적인 사례다.) 이 광경을 본 프랑스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는 자카르타 시장이 아니야. 빨리 일어나요.”

 
그날을 시작으로 우리 두 사람은 주방 실수 챔피언 자리를 놓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게 됐는데 디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대형사고를 저질러 번번이 나를 압도했다. 한마디로 내가 ‘걸어다니는 주방실수 포켓사전’ 정도였다면 디토는 ‘옥스퍼드 대백과’였다.
 

글 KBS 피디(www.kbs.co.kr/cook)  사진 이재영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다국적 식객부대, 한식의 처녀림 탐험

  • ekamoon
  • | 2011.04.14

누들로드 이욱정 피디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7> 밑반찬 냉면 육개장…, 그들의 입에 초긴장 한식의 세계화란 일방적 전파가 아닌 소통  ‘르 코르동 블뢰’는 세계 11개국에 14개 캠퍼스가 있다. 그중에서 런던 캠퍼스는 가장 다양한 나라의 학생들이 모인 학교다. 요리과정은 한 기수가 50명 정도 되는데 국적을 따져보면 15개 나라가 넘는다. 아무래도 영국이다 보니...

혼돈마왕이 정리정돈대왕 변신 ‘바른생활’

  • 박미향
  • | 2011.03.31

누들로드 이욱정 피디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6> 올빼미 체질의 지각대장이 ‘결사의 각오’로 새벽출근 셰프의 최고의 시연 요리로 점심은 ‘꿩 먹고 알 먹고’ AM 05:50. 휴대폰의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진다. 밖은 아직도 컴컴하다. 이불 밖으로 나온 발끝에서부터 냉기가 느껴진다. 내가 세 들어 사는 햄프턴코트의 플랫(영국식 연립주택)은 지은 지 50년 ...

'알덴테'의 맛도 피클 없으면 꽝!

  • 박미향
  • | 2011.03.31

문영화·김부연의 그림이 있는 불란서 키친 본토 스파게티 비법, 포장지를 살펴라  프랑스에는 다른 유럽국가에서 온 유학생들이 참 많다. 기차, 자동차로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지리적 요건도 그렇거니와 아르바이트, 건강보험 등을 공유하는 협정으로 경제적 부담까지 덜어주어 옆 동네 마실 가듯 오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유학 온 모니카는 남편과...

케이크 속엔 포근한 초콜릿이…

  • 박미향
  • | 2011.03.17

문영화·김부연의 그림이 있는 불란서 키친 하늘에서 내려온 '퐁당 쇼콜라' 파리에서 우리 부부의 집은 여덟 가구가 사는 4층짜리 아파트였다. 뒤에 마당이 있고 그 끝자리에 남편의 작업실이 있는데 부엌과 통하는 발코니에서 “밥 먹어!” 소리치면 금세 달려올 수 있는 거리였다. 처음 이사 올 당시 마당엔 괭이밥이 가득했다. 파리에서 내 땅 한 뼘 갖기란 너무...

TV 요리프로 스타 셰프 요리는 맛있을까

  • 박미향
  • | 2011.03.17

누들로드 이욱정 피디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5> 요리학교서 잘못하면 “ㅇㅇ처럼 요리하니?” 조롱 0.01% 대박-99.99% 고난 갈림길은 영상의 마법      ‘르 코르동 블뢰’ 근처에는 강의가 없을 때 몇시간이고 박혀 있는 나의 아지트가 있다. 본드 스트리트(Bond Street)의 워터스톤 서점이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요리 관련 서적이 많아 즐겁다. 서점 한쪽 전부가...

‘빠다’에 빠져들어가는 내 불쌍한 몸

  • 박미향
  • | 2011.03.03

누들로드 이욱정 피디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4> 프랑스 요리 일급 비밀은 버터 많이, 소금 더 더 취미와 일 사이 극과 극, 첫째 섹스 두번째 요리 ‘르 코르동 블뢰’에 입학하기 전까지 솔직히 프랑스 요리를 먹어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이탈리아 요리가 단골 외식메뉴이자 집에서 자주 해먹었던 ‘만만한’ 서양메뉴였다면, 프랑스 요리 하면 차림새도 멋지고 ...

고주망태 남편,홍합찜 응징

  • 박미향
  • | 2011.03.03

문영화·김부연의 그림이 있는 불란서 키친 홍합껍데기로 파먹으면 간단…프랑스식 먹는 법    늦은 시간 전화가 울렸다. 지인의 전시회에 갔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한잔하니 기다리지 말고 자라는 남편의 친절한 전화였다. 이런 종류의 모임은 감이 딱 온다. ‘오늘 안에 들어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얼마나 고주망태가 되어 들어올지 괘씸하고, 진작 연락이라도...

손바닥도 익고 접시도 익고 온몸으로 불맛 [1]

  • 이욱정
  • | 2011.02.17

누들로드 이욱정 피디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3> 조그만 실수에도 불호령, 신경은 칼날처럼 비명조차 못 지르고, 데드라인은 째깍째깍 한 방송국 피디가 있었다. 요리를 좋아했다. 수저를 들 때마다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떨렸다. 2008년 세상의 맛을 향해 카메라를 들었다. 한 알의 밀이 국수가 되어 세계인의 식탁을 주유하는 여행을 따라나섰다. 2년간 10개 나라를 다녔다...

수업 첫날 바로 ‘얼간이 클럽’ 멤버가 됐다

  • 이욱정
  • | 2011.01.27

누들로드 이욱정PD의 '르 코르동 블뢰'생존기<2> 150분 동안 온갖 실수에 ‘키친패닉’ 상태 한 방송국 피디가 있었다. 요리를 좋아했다. 수저를 들 때마다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떨렸다. 2008년 세상의 맛을 향해 카메라를 들었다. 한 알의 밀이 국수가 되어 세계인의 식탁을 주유하는 여행을 따라나섰다. 2년간 10개 나라를 다녔다. 그가 제작한 프로그램은 <인사이트 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모한 결심

  • 이욱정
  • | 2011.01.14

누들로드 이욱정PD의 '르 코르동 블뢰'생존기<1> "나만의 인생 레시피 만들자" 영국 요리학교 합격 한 방송국 피디가 있었다. 요리를 좋아했다. 수저를 들 때마다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떨렸다. 2008년 세상의 맛을 향해 카메라를 들었다. 한 알의 밀이 국수가 되어 세계인의 식탁을 주유하는 여행을 따라나섰다. 2년간 10개 나라를 다녔다. 그가 제작한 프로그램은 <인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