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다’에 빠져들어가는 내 불쌍한 몸

박미향 2011.03.03
조회수 9483 추천수 0

누들로드 이욱정 피디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4>
프랑스 요리 일급 비밀은 버터 많이, 소금 더 더
취미와 일 사이 극과 극, 첫째 섹스 두번째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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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동 블뢰’에 입학하기 전까지 솔직히 프랑스 요리를 먹어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이탈리아 요리가 단골 외식메뉴이자 집에서 자주 해먹었던 ‘만만한’ 서양메뉴였다면, 프랑스 요리 하면 차림새도 멋지고 맛도 기가 막히게 훌륭함에도 괜히 범접하기 어렵고 낯설게 느껴졌다.

가끔 이태원이나 서래마을의 프렌치 레스토랑에 가더라도 내 입맛에 꼭 맞는 오렌지 소스에 곁들인 오리고기와 해산물 요리 부야베스 몇가지만 주로 주문했다. 그러다 보니 프랑스 요리 하면 뭐하나 금방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아마 이렇게 모르다 보니 더 신비하게 느껴져서 프랑스 요리학교에 지원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별명이 ‘빵 피디’로 불린 나였지만 한 달만에 ‘으악!’

 

‘르 코르동 블뢰’ 요리학교 문턱을 넘으면서 먹을 복이 터졌다. 프랑스 음식을 종류대로 거의 매일 직접 요리하고 원없이 먹게 된 것이다. 세상의 어떤 일이든 취미이자 놀이일 때야 마냥 즐겁고 신난다. 하지만 똑같은 일이 직업이 되거나, 프로가 되기 위해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하면, 질리고 스트레스가 생긴다. 그런 차이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인간행위를 2가지 꼽는다면 내 생각에는 첫째가 섹스고 두번째가 요리 같다. 첫번째는 경험이 적어 잘 모르겠지만 프랑스 요리는 확실히 그랬다. 나로 말하면 타고난 ‘양식(洋食) 체질’로 방송국에서 한때 내 별명은 ‘빵 피디’였을 정도다. 유럽 출장 가서 몇주일이라도 논스톱으로 김치 생각 없이 버틸 수 있다고 자부해왔다. 하지만 그런 나도 양식 냄새로 전 주방 생활이 한달이 넘어가자 몸에 확실한 신호가 왔다. 으악, 느끼해서 더 못 먹겠다!

 

‘빵 피디’도 역시 태생은 속일 수 없었던 걸까? 바보 같은 질문 하나. 이따금 먹을 땐 입이 착착 달라붙던 프랑스 요리가 왜 매일 먹게 되자 한달도 채 안 돼서 질릴 수밖에 없었을까? 한식은 1년 내내 먹어도 안 그런데 말이지. 요리학교 주방에서 비밀의 해답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통적인 한식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는 식재료 한가지가 프랑스 요리에는 어마어마하게 들어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실습실 냉장고에 언제나 가득 가득 채워져 있는 식재료이자 프랑스 요리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 버터였다.

 

 

한국인 평생 소비량을 프랑스인들은 일주일만에 

 

버터가 들어가지 않은 프랑스 요리를 찾는 것보다 간장이 들어가지 않은 한국 요리를 찾는 편이 더 쉬울 만큼 버터는 프랑스식 레시피에서 중요하다. 프랑스 요리의 양념과 소스를 만들고 고기와 생선과 채소를 굽고 볶고 졸이는 조리의 전 과정에서 빠지는 법이 없다. 이 미끈미끈한 동물성 지방 덩어리는 한마디로 프랑스 요리 맛내기의 기본재료이자 천상의 조미료이자 프랑스인의 일용할 양식이다. 내가 ‘르 코르동 블뢰’에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버터가 사라진다면 프랑스 셰프들은 반쯤 미쳐서 “버터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며 거리를 내달릴 것이고, 얼마 못 가 인류의 주방에서 프랑스 요리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며, 수주일 내에 프랑스 민족도 멸종할 것이 분명하다.

 

버터는 프렌치 퀴진에 다양하게 쓰일 뿐 아니라 엄청나게 들어간다. 과장을 좀 보태서, 평균적인 한국인이 평생 소비하는 버터를 평균적인 프랑스인은 아마 일주일(건강을 챙기는 프랑스인의 경우는 대충 한달 이내가 될지 모르겠지만)에 다 먹어치워 버릴 것이다. 보통 실습 시간에 메인 요리와 사이드 요리 등 두가지 요리(2인분)를 한다고 치면 이래저래 150~250g의 버터가 들어간다.

사실 한국에서야 250g 작은 팩에 담긴 노란 버터 한 덩어리 사면 토스트 빵에 몇번 발라 먹다가 냉장고 한구석에서 몇달이고 방치하다 버리기 일쑤였다. 한동안은 버터보다 마가린이 좋다고 해서 아예 구입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양식 애호가인 나 같은 사람도 버터를 다량 섭취할 일이 없었다.(알게 모르게 각종 디저트와 빵에 숨어 있는 버터의 양을 감안한다고 해도) 그런데 갑자기 일년치를 일주일에 몰아 먹기 시작했으니 몸 안의 세포들이 반기를 든 것은 당연했다.
 

 

몸이 비명 소리를 낸 이유 한가지 더, 짜게 더 짜게 

 

내 몸이 ‘으악’ 비명 소리를 낸 이유가 한가지 더 있었다. 프랑스 음식은 대체로 간이 장난 아니게 세다. 요리를 내 입맛에 맞게 적당히 소금을 넣었다간 바로 감점이다. “More Salt, More Salt!”(소금 더 많이!) 내 접시를 맛본 프랑스 선생님들에게 매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소리다.(하긴, 맛없다, 맛있다를 가르는 기준은 문화적인 것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맛있음’은 습관이고 중독이다) 마찬가지로 음식이 ‘짜다’, ‘싱겁다’, ‘간이 적당하다’의 판단기준도 한국이 다르고 프랑스가 달랐다. 어쨌든 ‘르 코르동 블뢰’의 주방에서는 프랑스 셰프의 입맛이 곧 법이니 나야 거기에 열심히 맞출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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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요리를 평가하는 선생님

 

 

초급반의 어느 시연 수업이었다. 그날도 역시 프랑스 셰프는 버터와 소금을 듬뿍듬뿍 넣어 요리를 하고 있었다. “Just a little bit of butter”(버터 약간만 더)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손에는 이미 큼지막한 노란 지방 덩어리(평균 한국인의 1년 소비량 정도 될 듯해 보이는)가 들려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킥킥 웃음소리가 들렸다. 셰프도 슬쩍 미소를 띠며 “Come on, I am a French”(나 프랑스 사람이잖아)라고 말하면서 넘긴다.

 

옆 자리의 크로아티아에서 온 토미가 귀띔을 해준다. “욱정, 너 실습시간에 높은 점수 받는 비법 알려줄까. 레시피보다 20% 정도씩 버터랑 소금을 더 넣어, 그러면 셰프들이 아무리 망친 요리라도 대충 맛있다고 점수를 더 줘.” 핸드폰 사업을 하다 온 토미는 나랑 비슷한 그룹 C군(일명 키친얼간이클럽) 소속이었기에 그의 비법이 약간 미심쩍기는 했으나 얼핏 들었을 때 쓸 만한 팁 같았다.
 

 

그가 알려준 높은 점수 히든카드, 그러나 안 통했다
 

곧이어 시작된 실습시간. 토미의 히든카드를 써먹을 기회가 바로 왔다. 그날 메뉴는 오리 가슴살 로스트에, 소테한 시금치, 으깬 감자. 아무래도 불안하여 버터를 있는 대로 집어넣기 시작했다.(그래도 소금은 토미보다 약간 덜 넣었다) 팬에 올린 뜨거운 버터 위에서 지글지글 익는 고기를 보니 정말 평소보다 맛있어 보였다. 평가를 받기 위해 완성된 요리를 들고 셰프에게 갔다. 평소보다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한 입 딱 맛보고 나서 프랑스 셰프 왈, “Too much butter.”(우왁, 느끼해) 역시 토미 말은 믿을 게 아니었다.

 

학교생활이 3개월이 넘어가자 알 수 없는 신체 변화가 느껴졌다. 어쩌다 연휴가 겹쳐 학교를 며칠 안 가다 보면 버터향이 그리워지게 됐다. 요즘은 버터를 넣지 않으면 도무지 음식 맛이 나지 않는다. 예전에는 건강 챙긴다고 올리브오일 넣었을 요리에도 한 덩어리를 넣어야 왠지 마음이 놓인다. ‘르 코르동 블뢰’의 주방에서 내 몸은 서서히 길들여지고 있었다.
 

글 KBS 피디(www.kbs.co.kr/cook), 사진 이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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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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