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서른여섯. 친구 G와 함께 북한산 밑에 산다. 직장에 다니는 고로 요리를 하는 건 일주일에 토요일 아점 한 끼뿐. 밥 해먹는 횟수가 적으니 요리 실력은 당최 늘질 않는다. 그래도 관대한 입맛으로, 충분치 않은 맛은 상상으로 보충해가며 기껍게 먹는다.
그렇다. 나는 관대하다. 적어도 입맛만큼은. 동남아발 각종 향채를 즐기고 낯선 음식도 가리지 않는다. 오리 정강이와 부리 조림도 입맛을 다시며 먹는다. 베이징 뒷골목에선 양 골수에 빨대를 꽂고 빨아먹기도 했다. 고소하고 몸에 좋은 맛이었다.
얼마 전 후배가 놀러와 이란 커리를 만들었다. 정확하게는 성균관대 앞에 있는 ‘페르시아 궁전’이라는 이란 커리집에서 사온 커리 가루로 만든 ‘카레’.
강황, 커민, 정향 등 24가지 향신료를 배합해 만들었다는 이란 커리는 향이 풍성하고, 맛이 은은하고 부드러워 양고기, 쇠고기, 닭고기 모두 구수하게 잘 어울린다. 내 입맛의 관대함을 자랑하기엔 이란 커리는 부족함이 있다. 한국식 카레에 비해 크게 낯선 맛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재료를 넣든, 음, 카레군. 하게 만드는 커리의 관대함, 놀라운 포용력을 칭송해야 하겠다.
1 커리집에선 맛있게 먹었는데, 뭐가 들어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야채와 고기가 적절히 섞이면 좋겠지 싶어 버섯, 당근, 양파, 꽈리고추 그리고 닭봉을 샀다. 그래도 이란 커리니까 내 맘대로 토마토와 플레인 요구르트를 넣어보기로 했다.
2 만드는 법은 배운 적 없으니, 그냥 내키는 대로. 우선 재료를 썰어놓는다. 냄비에 기름을 두르고 딱딱한 애들부터 볶는다. 양파가 말갛게 변하면 물을 한 컵 붓고 뚜껑을 덮고 끓인다.
3 곁들여 먹을 국물은 유채 된장국. 멸치 다시마 국물을 내 된장을 심심하게 풀어 넣는다. 펄펄 끓을 때 유채 입하. 유채가 새파랗게 질리다가 그 빛을 잃을 때쯤 불을 끈다.
4 닭봉은 씻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뜨거운 물을 부어 헹궈냈다. 살짝 익은 닭봉을 기름을 두른 팬에 노릇하게 굽는다.
이 커리는 한때 남몰래 만나던 남자와 ‘페르시아 궁전’에 갔다가 사온 것이다. 그와 나는 사귄다기보다는 맛있는 걸 찾아다니며 먹는 일종의 밥 친구였는데, 자주 같이 밥을 먹다보니 정이 들었다. 만난다. 뭐 먹을지 토론한다. 먹으러 간다. 집에 온다. 대략 이런 패턴은 우리가 암묵적으로 맺은 ‘밥 협정’이었다. 같은 음식을 뱃속에 집어넣고 서로의 일상을 조잘대는 일이 꽤 즐거웠던 건 역시 ‘밥심’ 때문이었던가. 펄펄 끓어 뜨겁지도, 식어 써늘하지도 않아 한달음에 후루룩 먹기 좋은 국밥 같은 시간들이었다. 나름 평화로웠던 이 협정은 밥심을 애정으로 착각한 내가, 우리 관계가 대체 뭐냐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결국 깨지고 말았다. 그건 노처녀가 절대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3대 금칙어 중 하나였으니(나머지 둘은 사랑과 결혼),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5 이란 커리 봉지를 뜯는다. 가루를 쏟아 붓는다. 정량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일단 넣고, 짜면 물을 붓고 싱거우면 커리를 더 넣기로 결정. 먹어보니 간이 대충 맞는 것 같아서 그대로 go.
야채가 무르기 전에, 잘게 썬 토마토와 플레인 요구르트를 한 통 넣고 끓이다가 구운 닭봉과 꽈리고추를 넣는다. 꽈리고추가 새파래지면 완성.
처음 만들어본 이란 커리의 맛은. 음… 카레였다. 토마토 때문에 조금 새콤하고, 요구르트 때문에 살짝 고릿한 맛. 진짜 이란 사람이 먹으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관대한 입맛으론 먹을 만했다. 이란 커리가 있다면 이런 카레도 있는 것이다. 그때 그 남자가 떠오른다. 딴에는 이게 무슨 관계인지 고민했는데, 이제는 이런 사랑도 있구나 생각하기로 한다. 그래도 그때 그 밥들은 참 따뜻하고 맛있었지.
글.사진 김송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