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마왕이 정리정돈대왕 변신 ‘바른생활’

박미향 201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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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들로드 이욱정 피디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6>
올빼미 체질의 지각대장이 ‘결사의 각오’로 새벽출근
셰프의 최고의 시연 요리로 점심은 ‘꿩 먹고 알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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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05:50. 휴대폰의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진다. 밖은 아직도 컴컴하다. 이불 밖으로 나온 발끝에서부터 냉기가 느껴진다. 내가 세 들어 사는 햄프턴코트의 플랫(영국식 연립주택)은 지은 지 50년 이상 된 것이라 난방이 시원치 않고 외풍도 심하다.

예전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영국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 나이트 캡(취침 전 마시는 술)을 한잔하고 우스꽝스런 고깔모자를 쓴 채 잠자리에 드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이제는 이해가 간다.(전기담요는 영국 유학생활 필수품이다. 소주도 챙겨올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자전거로 가로숫길 달리다보면 여우가 후다닥
 

억지로 몸을 일으켜 고양이 세수를 하고 물 한잔 마시고 옷을 챙겨 입자마자 밖으로 나온다. 5분이라도 지체하다가는 런던 가는 6시52분 기차를 놓치기 때문에 잠깐의 여유조차 없다. 방송사에 있을 때는 지각 출근을 생활화했고 심지어는 고3 때도 아침 7시 이전에 일어나본 기억이 없는, 타고난 올빼미 체질인 나에게 이런 새벽 기상은 한마디로 죽음이다. 하지만 15분 이상 수업에 지각하면 바로 결석처리가 되고 한 학기 결석 5회면 자동유급되는 ‘르 코르동 블뢰’의 엄격한 학칙 때문에 아침마다 ‘결사의 각오’로 학교에 가야 한다.

 

집에서 햄프턴코트 기차역까지는 자전거로 달린다. 가로수가 울창한 팰리스 로드에는 아직 인적이 드물다. 후다닥 짐승 한 마리가 자전거 소리를 듣고 덤불 속으로 숨는다. 여우다. 런던 근교 주택가에는 여우들이 많이 돌아다닌다. 처음엔 화들짝 놀랐지만 이제 낯익은 이웃이다. 햄프턴코트역은 헨리 8세가 살았던 햄프턴코트 성 코앞의 작은 간이역이다. 그곳에서 런던 워털루역까지 가는 기차는 바쁜 러시아워에도 한 시간 딱 두 번. 놓치면 끝장이다.

 

기차에 오르기 전 역 구내에서 1.8파운드짜리 카푸치노 한 잔을 테이크아웃으로 들고 플랫폼으로 향한다. 내 자리는 언제나 1호차의 중간 창가 좌석이다. 객차는 텅 비어 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는다. 요즘 즐겨듣는 곡은 원 리퍼블릭(One Republic)의 ‘굿 라이프’(Good Life). 달리는 차창 밖으로 멀리 동이 터온다. 그 풍경들은 매일 보아도 정신을 깨우는 묘한 아름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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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동 블뢰'의 주방

 

 

 

나만의 공부비법 ‘만화레시피’로 한눈에 쏙
 

AM 07:50. 말리본 거리에 있는 학교에 도착. 2층의 남자 라커룸으로 뛰어올라간다. 백색의 ‘르 코르동 블뢰’ 유니폼을 번개같이 갈아입고 1층의 시연 강의실로 내려간다. 좋아하는 자리는 교실 뒤편 왼쪽 가장자리 좌석. 단짝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What’s up, Lee!” 브라질에서 변호사로 일하다 온 호세가 옆자리에서 인사를 한다. 억세게 생긴 긴 턱에 박박 민 깍두기 머리 스타일 때문에 처음 만났을 때는 변호사가 아니라 ‘변호사가 필요한’ 인상으로 보였지만 에너지가 넘치고 정이 많은 친구다.

 

전날 수업에 못다 적은 필기를 보여 달라고 인도 친구 푸자에게 신호를 보낸다. 초롱초롱하면서 선한 눈망울을 가진 푸자는 뭄바이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재원인데 그녀의 노트 필기는 꼼꼼하기로 유명하다. 아무리 바빠도 노트를 선뜻 내주고 시험 때는 워드 파일로 정리한 요약본까지 보내주는 천사표다. ‘르 코르동 블뢰’에 다니면서 느낀 건데 요리에 진정한 열정을 가진 친구들을 보면 열에 아홉은 남에 대한 배려심이 많고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부지런한 사람들이다.(하긴 제 입부터 챙기는 이기적이고 게으른 사람이 남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일을 평생 업으로 삼기는 아무래도 좀 어렵겠지.)

아침 8시에 시작한 오전 시연수업은 11시까지 계속된다. 2개월 정도 지나고 나니 수업 내용이 이제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눈으로 따라가기도 벅찼던 셰프의 조리 과정이 구분 동작으로 머릿속에 그려지고, 이해 불가의 다빈치 코드 수준이었던 주교재의 레시피도 대충 읽어보면 상상 속에서 먹음직스런 완성품의 이미지로 그려질 정도가 되었다.

이런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나만의 공부법이 한몫했다. 일명 만화 레시피! 활자보다는 영상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에 익숙한 티브이 프로듀서라는 직업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만화 레시피는 시연수업 조리 과정을 가구 조립 매뉴얼처럼 단계별로 ‘그려보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그린 덕에 그림 수준은 썩 훌륭하지 못하나 조리 과정이 비주얼하게 한눈에 쏙 들어오는 이점이 있다.
 

셰프의 최고의 시연 요리로 점심은 꿩 먹고 알 먹고

 

11시부터 12시까지는 점심시간. 아무리 바빠도 오후의 실기 수업을 버티려면 잘 먹어 두어야 한다. 점심에 뭘 먹을까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선생님이 만든 요리의 꾸밈새를 잘 관찰하고 맛과 질감을 음미하는 것은 시연 수업의 중요한 학습방법이기도 하지만 점심값을 절약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도 하다. 셰프가 최고의 재료로 직접 요리한 것이니 위생적이고 맛도 당연히 좋다. 요리학교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최고의 호사다!

오후 실기수업은 보통 1시 또는 3시부터 시작한다. 수업 시작 최소 10분 전에는 조리도구와 복장을 완전히 갖추고 실습실 앞에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 주의 당번일 경우 30분 전에 지하의 재료 저장고에 그날 쓰일 식재료를 받으러 가야 한다. 르 코르동 블뢰에서는 당번을 ‘수 셰프’(보조주방장)라고 부르는데 실습실에 가장 먼저 입장하여 재료 묶음을 개인별로 나누어 주는 일부터 수업 뒤 마지막 청소상태 점검까지 주방의 귀찮은 일을 도맡는다. 수 셰프가 꼼꼼하고 헌신적일수록 반 전체가 큰 덕을 본다.

방송사 피디로 일할 때는 사무실 청소 같은 것이야 나와 무관한 ‘허드렛일’이었다. 요리학교는 그런 나를 서서히 바꾸어 놓았다. 다른 이를 위해 귀찮은 일, 허드렛일을 선뜻 할 수 있는 것이 봉사라는 것을 배우고 있다.(요즘 학교나 가정의 세태가 학생들에게 청소나 심부름을 할 시간에 ‘공부 한 자’라도 더 하길 바라는 것 같은데 과연 그게 옳은 건지는 모르겠다.)
 

주방에서는 그런 ‘허튼 습관’은 용서받지 못할 중죄
 

요리학교 주방에서 배우는 또다른 인생의 노하우는 정리 정돈이다. 해산물 요리로 유명한 영국의 셰프 릭 스타인이 쿠킹에 대해 짧게 정의 내리길 “요리는 한마디로 정리정돈을 잘하는 것이다”(In short, Cooking Is Organizing!)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정리정돈을 잘해야 한다고 함은 조리하는 공간을 위생적으로 깨끗이 치워가며 일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더 넓게는 계획적으로 생각하면서 요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책상 정리 안 하기로 방송국 내에서 악명 높은 카오스의 대마왕이었다. 깨끗이 정리된 책상에서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다고 애써 강변하며 어지르기를 계속한 결과, 사무실의 책상 위는 일년 내내 재앙 상태였다. 그런데 르 코르동 블뢰 주방에서는 그런 ‘허튼 습관’은 용서받지 못할 중죄에 해당했다. 그 버릇을 고치지 않고는 (또는 고치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으면) 주방에서 버틸 수 없었다. 만약, 방송사 동료들이 요즘 우리 집 주방을 본다면 이곳이 ‘대마왕’의 키친이라는 사실을 절대 믿지 못할 것이다.(푸하하!)

 

글 KBS PD(www.kbs.co.kr/cook) 사진제공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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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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