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의 자격, 야성이냐 과학이냐

박미향 201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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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들로드 이욱정 피디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10>

  퀴지니에와 파티시에…살벌한 라이벌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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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 코르동 블뢰’의 학과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프랑스 요리 전반을 배우는 퀴진과 디저트와 빵 만들기를 배우는 파티스리 과정이 그것이다. 나처럼 두 과정을 전부 수강하는 이도 있지만 한쪽만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고 실습교실과 담당교수까지 전부 다르다 보니 두 학과 학생들은 졸업할 때까지 서로 말 한마디 나눌 기회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서로 별로 아는 척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탈의실에서 마주쳐도 마치 각기 다른 은하계에서 온 생물체들 마냥, 그 흔한 “하이!”도 오가는 법이 없다.
 처음에는 왜 그럴까 했다. 그런데 두 과정을 모두 수강하면서 수수께끼가 하나둘 풀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있어 이것은 서로 판이하게 다른 문화를 가진 두 부족사회를 비교하는, 일종의 인류학 현지조사 같은 것이었는데 이들 부족들의 복잡한 정신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작업이기도 했다. 현지조사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두 무리 사이에는 아주 오랜, 그리고 상당히 격렬한 라이벌 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퀴진(요리학과) 학생들은 자신들을 빵이나 굽는 파티스리(제과제빵) 녀석들보다 우월한 계급이라고 여긴다. 이런 주방 카스트제도를 뒷받침하려는 몇 가지 자체논리가 개발되어 있었는데 우선, 자주 거론되는 것이 요리학과 교과목에는 기본적인 제과제빵 메뉴가 몇 가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신들은 요리도 하고 디저트도 만들 줄 알지만, 반대로 ‘그들’은 오로지 디저트밖에 만들 줄 모른다는 것이다. 3단으로 쌓아 올린 초콜릿 공예를 들고 제과제빵학과 학생들이 복도를 지나가면 요리학과 학생들이 킬킬대며 하는 소리가 있다. “저걸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제과제빵은 딱 우리가 배우는 기본만 알면 충분해.”
 

설탕·초콜릿이나 주물럭대는 주제에…
 
 

둘째, 그들은 퀴진의 세계야말로 진짜 사나이들의 세계이자 셰프의 영토라고 믿는다. 빨간 눈을 크게 뜬 채 죽어 있는 토끼의 머리를 부처나이프(Butcher Knife·고기 자르는 큰 칼.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로 콧노래까지 부르며 단칼에 자를 수 있는 두둑한 배포와, 뜨겁게 달구어진 무쇠 프라이팬을 한 손으로 척 잡아들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티본스테이크 덩어리를 갖고 놀 수 있는 강한 근육의 소유자만이 진정한 셰프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팔뚝 굵기가 내 허벅지만한 요리학과 친구 네이슨(영국 특수부대 출신이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설탕·초콜릿 나부랭이나 주물럭대는 파티스리는 연약한 ‘계집아이’들이나 하면 딱 맞지” 이런 식이었다. 한마디로, 오르되브르(전채요리)에서 메인(주요리)까지 책임지는 자신들이야말로 쇼의 최고 하이라이트이자 무대 위의 유일한 주연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디저트는 요리의 대향연에서 한낱 보기 좋은 마무리용 장식이자 예쁘장한 조연 정도라고나 할까.
 파티스리 부족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먼저, 미식의 역사를 살펴보면 잘난 체하는 퀴지니에(요리사)들의 역사적 뿌리는 알고 보면 자기들 파티시에(제과제빵사)였다고 주장한다. 근대 프랑스 요리의 초석을 다진 전설적인 인물 앙토냉 카렘은 원래 요리전공자가 아닌 제과제빵사였고 그의 예술적인 능력이 가장 잘 드러난 메뉴도 설탕세공이었다는 것이다. 둘째, 요리학과에서 배우는 디저트는 초보 중의 초보 수준이요, 매우 저급한 테크닉의 것으로 치부한다. 제과제빵 학생들은 퀴진 아이들이 레몬 타르트나 마들렌 등 겨우 몇 가지 디저트를, 그것도 엉망으로 만들어보고서는 감히 “나도 디저트 좀 아네” 하고 나대는 것을 못마땅해한다. 한마디로, 연기 나는 고깃덩어리가 식탁의 주인공이던 시대는 이미 끝났으며 오늘날은 손님의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디자인의 달콤한 디저트야말로 코스의 피날레이자 그날 요리의 최종 인상을 결정짓는 참된 종결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파티시에만이 요리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킬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이다.
 
 

연기 나는 고깃덩어리의 시대는 끝났어!
 
 

 

마지막으로, 파티시에 부족의 문화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논리는 딱 이 한 문장으로 집약된다. “파티스리는 과학입니다.” 제과제빵 수업을 시작하기 전 ‘그쪽 진영’ 교수님과 학생들로부터 이 말을 최소한 다섯번 들어야 했다. 이것은 종족의 정체성을 위해서 파티시에들이 하루에 한번씩은 꼭 되뇌어야 하는 경구 같은 것이자 라이벌 종족과의 자존심 대결을 위해 항상 몸에 지녀야 할 심리적 부적 같은 것이었다. 이 경구를 부족의 언어로 알기 쉽게 풀이해 보면, 퀴진은 레시피에 나온 계량과 순서를 무시하고 적당히 굽고 끓이다가 나중에 소금·후추로 간만 잘 맞추면 대충 맛을 낼 수 있는 엉성한 체계로 이루어진 반면에, 파티세리는 재료의 양과 발효의 시간, 오븐의 온도 등 레시피에 기재된 공식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지키지 않을 경우, 제대로 된 완성품이 나올 수 없는 과학의 소산이라는 말이었다.
 파티스리 첫 수업, 제과제빵 과정 교실을 찾고 있는데 복도에서 요리학과 주임 셰프와 마주쳤다. “미스터 리, 이제 파티스리 공부 시작하는 건가. 자네는 요리과정을 경험했으니깐 제과제빵은 누워서 떡먹기(a piece of cake)일걸세. 긴장 풀고 해도 돼.” 이렇게 나는 으르렁대는 두 부족 사이의 국경을 넘어 드디어 디저트의 나라에 입성했다.
 제과제빵 실습실에 들어서자마자 느낀 것은 요리학과에 있을 때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10명 중 8명이 여자였다. 물론 퀴진 과정에도 여학생들이 2~3명 정도 있기는 했지만 남성 호르몬 과다분비가 의심되는 ‘마초걸’(macho girl) 들이 많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파티시에르(여성 제과제빵사) 지망생들은 외모도 얌전해 보이고 움직이는 동선도 여성스러움이 넘쳐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남학생까지도, 역시 호르몬 이상 때문인지 학과 분위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고 성격도 꼼꼼해 보였다. 요리학과에서 온 사람은 나 혼자. 모두 상냥한 미소로 나를 반겼지만 “그래, 퀴진 놈아, 얼마나 잘하나 보자” 이런 무언의 시선들이 목 뒤로 뜨끔뜨끔 느껴졌다.
 글 KBS PD(www.kbs.co.kr/c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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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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