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른즈음에 돌아온 싱글로 독립했다. 신촌 자취방에서 회사를 다니며, 담배와 술에 쪄들어 건강이 바닥이 날때 즈음, 한때 유행한 A형 간염에 신장합병증으로 한달이나 병원신세를 졌다. 중환자실에 까지 갔다온 나를 부모님은 절대로 혼자 살게 놔두지 않으셨다. 부모님의 불호령에 서른 중반 느즈막히 다시 얹혀 살게 됐다. 벌써 2년이 지난 가을 어느 날이였다. 자연스레 담배도 끊고 집 밥을 먹으며 다니니 살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주말엔 으레 어머니와 수산시장에 들려 장도 보고 주말 먹거리를 고민했다. 알이 찬 꽃게가 갓 나오기 시작해 눈에 띄었다. 꽃게 무침과 탕을 먹자는 내 제안에 어머니는 손사레를 치시면 너무 비싸다고 하셨다. 한번 더 얘기했지만 거듭 손사레를 치시는 어머니에게 더 얘기하지 않았다. 회사는 다니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궁핍한 사정을 헤아리신 배려였다. 좀 더 시선을 넓게 보니 떨어진 꽃게다리만 수북히 쌓아놓은 바구니가 보였다. '아주머니 이거 얼마예요?' '5천원에 다 가져가요'라고 하신다. 순간 어떤 음식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 얼굴 볼 새도 없이 돈을 지불하고 봉투를 건네 받았다. 어머니에게 '나 이거 삶아서 안주로 먹을래요' 하니'까먹기도 힘들텐데 넌 먹는 것도 유별나다'고 하신다. 집에 오는 길에 야채가게를 들려서 돗나물, 상추 약간, 무순을 조금씩 샀다. 집에 오자마자 냄비에 물을 올리고는 꽃게다리를 삶았다. 몸통에서 떨어져 천대받는 다리지만 꽃게 향기는 오히려 더 진했다. 다 삶아진 꽃게 다리를 수북히 쟁반에 쌓아 놓고, 잘 드는 가위 하나, 비닐장갑을 끼고는 열심히 살을 발라냈다. 생각보다 다리살이 꽉 차 있어 발라내니 수북히 쌓여 갔다. 아직 늦더위가 남아 있었던가?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한시간 남짓 용케 백개도 넘는 다리살을 다 발라냈다. 그리고 살을 발라 낸 껍질을 다시 냄비에 담고 어머니가 된장찌게 끓일 때 쓰시는 멸치다시마 육수를 부어 중불에 올렸다. 마지막에 넣을 계란 하나를 풀어서 준비했다. 이제는 상을 봐야할 차례, 조금 넓은 사발에 밥을 소복히 쌓고 잘게 썬 당근, 상추, 돗나물, 무순, 얇게 채를 친 양파를 가지런히 돌려 얹었다. 가운데에는 오늘의 주 재료 꽃게 다리살을 가운데에 소복히 올렸다. 그리고 매실청을 곁들인 초고추장을 넣어 비벼 어머니, 아버지, 나 이렇게 한입씩 베어 물었다. 아~꽃게 내음 가득한 비빔밥, 그리고 꽃게탕은 못하지만 꽃게다리의 향이 살짝 얹어진 계란국(?) 한 모금에 부모님의 흐뭇한 미소를 순간 보았다. 마흔을 바라보는 아들이 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이 효도겠지만 주말의 가족과의 정성스럽게 준비한 한끼 식사도 효도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요새도 가끔 비싼 식재료는 아니지만 정성이 들어간 한끼를 고민하며 시장을 들리곤 한다. 이번 주는 회사 워크샾으로 간 배 낚시에서 우럭과 광어를 잡아 회덮밥을 해드리면 좋으련만, 물론 거기에 맑은 지리탕을 곁들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