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선물> 깔깔한 깨죽

조회수 10640 추천수 0 2013.01.15 14:32:54

깔깔한 깨죽

 

남편의 외숙부댁은 아직도 생일날이면 동네 방송을 통해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는 시골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혼자 살고 있던 남편은 결혼을 위해 외삼촌댁에 인사드리러 가자고 했다. 외삼촌댁은 어려운 시골 형편에 남편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해주는 곳이었다.

자식이 6명이나 되는 외삼촌 가족은 나를 보려고 집안 가득 모두가 모여있었다. 동네에 사는 가깝고 먼 친척들도 다 모여 있었다. 그리고 외숙모님께서 이것저것 물어보시는데 나는 긴장되어 어색하게 입가에 웃음만 짓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상을 차려 내오셨다. 모든 반찬은 외숙모님의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갈비를 재우고 생선 요리가 있었지만 내 눈에 더 뜨인 것은 숙모님이 손수 하신 묵무침과 단단한 모양새는 아니어도 너무나 고소한 두부조림. 외숙모님은 집에서 손수 맷돌을 돌리고 불을 때서 묵과 두부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가을에 갈무리한 고구마순, 가지, 장아찌로 담은 고추, 깻잎까지. 모든 것이 외숙모댁에서 1년간 키워 상 위에 그득하게 차려져 있었다. 무뚝뚝해 보이는 어른들 속에서도 나는 너무도 맛있게 한 그릇을 비워내었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외숙모님이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어느 잔치집에서 음식을 잘 못 드셔 탈이 났다고 하셨다. 새신부인 나는 뭔가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성을 담아 드리고 싶었다. 음식을 잘 못 드신다니 죽을 쑤어다 드리면 어떨까? 학업과 직장 생활로 거의 살림을 해보지 않은 나는 요리에 소질도, 관심도 없었다. 어언 20년 전 그때, 나는 그냥 머릿속으로 생각되는 대로 죽을 쑤었다. 고소하고 맛있는 깨죽을 쑤려고 시장에서 깨를 사다가 물에 씻으니 동그란 깨가 물에 둥둥 뜬다. 채에 받쳐 갈아서 죽을 쑤어 가지고 외숙모님 병문안을 갔다. 보온병에 가득 담아 가지고 간 깨죽을 내놓으니 외숙모님이 웃으며 맛을 보신다. 갑자기 얼굴을 찌뿌리다 말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 입 속이 깔깔해서 먹을 수가 없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웃음을 애써 참으시며 숙모님은 들깨로 죽을 쑬 때는 겉껍질을 날려버려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그 사실을 당연히 알지 못했다. 깔깔한 껍질째 죽을 드시면서 외숙모님은 계속 웃음을 참지 못하셨지만 그 정도의 상식도 없으면서 겁 없이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온 나의 마음을 아셨던 것일까? 한마디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끝까지 다 드셔주셨다. 안 그래도 요리의 달인이셨던 외숙모님이 보시기에 나는 얼마나 한심한 아줌마였을지.

세월이 흘러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참 겁없던 새댁이었다. 하지만 그때만큼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누군가에게 대접했던 기억은 없어보이니 내 스스로가 대견하지 않을 수 없다.

/ 전북 정읍시 이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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