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들로드 이욱정피디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박미향 201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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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난 예비셰프들 “잠깐만 참았더라면…”

주방에 난무하는 욕설…물리적 폭력에는 ‘불관용’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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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들이 등장하는 영국의 티브이(TV) 리얼리티 쇼를 보면 빠지지 않는 캐릭터가 있다. 지상파 방송에서 저래도 되나 할 정도로 말끝마다 비속어를 남발하고 성질나면 접시부터 공중에 날리고 본다. 바로 고함지르는 욕쟁이 셰프다. 폭군의 가련한 희생양은 지옥의 주방에 막 발을 디딘 수습요리사들. 이들 역시 언어 폭력의 방사능에 금세 전염이 되어 욕쟁이들로 변해가고 주방의 대기는 사방이 쌍시옷 발음기호로 가득 차버린다.
 리얼리티 쇼 수준은 아니지만, 요리학교 주방의 언어생활도 거칠기는 매한가지다. 한국 남자들은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평시 ‘선량한 시민’일 때와 판이한 껄렁한 언어·행동 패턴을 보일 때가 있는데 요리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평소에는 그렇게 점잖던 친구들이 조리사복을 입고 키친에 들어가는 순간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다. 예를 들어 나와 같은 반의 S양. 보통 때는 그렇게 지적이고 조신해 보이지만 조리를 시작하면 갑자기 욕쟁이 할머니로 변신한다. 실수로 스테이크가 시커멓게 오버 쿡 돼버렸다 치면 그 작고 귀여운 입술로 ‘f**k’, ‘S**t’ 등등 영어교과서에는 절대 실리지 않는 어휘들을 거의 갱스터랩 스피드로 뱉어낸다. 처음에는 그런 친구들을 보면서 끌끌 혀를 차던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지 언제부턴가 요리가 생각대로 안 나오면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것도 영어로! 못된 것부터 먼저 배운다고 이러다가는 요리 실력보다 욕하기 실력이 더 빨리 늘 것 같다.
 왜 이럴까? 당연히 초고압의 스트레스 때문이다. 집에서 취미 삼아 요리할 때야 그런 법이 없었다. 하지만 뜨겁고 날카롭고 시끄러운 것들로 채워진 비좁은 실습실 주방에서, 똑같이 데드라인에 쫓기는 경쟁자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일할 때는 상황이 다르다. 곰곰이 따져보면 참 사소한 좌절인데도-예를 들어 마감시간 10분 전, 커스터드 크림을 급히 만들려고 달걀을 찾았는데 어느 놈이 내 몫까지 몽땅 써버렸거나, 1시간 넘게 졸인 양갈비 소스 냄비를 누가 툭 쳐서 바닥에 몽땅 엎어버렸을 때 같은-이상하게 주방에서는 스트레스 레벨이 급상승하고 입도 따라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욕이란 것이 긴장감과 불안감에 짓눌린 인간에게 압력밥솥의 스팀 배출구 같은 치유효과가 있다고 믿지만 그건 혼자 내뱉고 혼자 삭였을 때 이야기다. 주방에서 동료에게 욕 한마디 잘못 내질렀다가 대형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주방 열기 식히는 육두문자의 치유효과

 

대형사고의 주인공은 나의 두 ‘절친’인 브라질에서 온 H와 크로아티아 출신인 T였다. H는 브라질 요리를 먹으러 집에 놀러 갈 정도로 친한 사이였고, T 역시 나와 마음이 잘 통하는 최고의 술친구였다. 두 사람 모두 요리 열정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고 르 코르동 블뢰 학생임을 항상 자랑스러워했는데 성격이 다혈질이고 남에게 지기 싫어한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비슷했다.
 사건이 터진 날은 아침 1교시부터 실습수업이었다. 당시 H와 T 두 사람 모두 런던의 레스토랑 키친에서 늦은 밤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그래서 잠이 부족한 상태였다. 아직 늦여름이라 주방 안은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충돌의 발단은 별것도 아닌 말다툼이었다. 실습수업이 시작한 지 1시간 정도 지났을까, 나는 생선 필릿(fillet)을 다듬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등 뒤로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H는 T가 자꾸 자기 작업대를 침범하여 식재료를 어지럽게 놓는 통에 일을 할 수 없다고 화가 잔뜩 나 있었다. T는 “웃기지 마라, 난 그런 적이 없다. 오히려 네가 자기 선반 위에 냄비를 올려놓아 일을 못하겠다”고 되받아쳤다. 마침 선생님은 모자란 재료를 가지러 잠깐 자리를 비운 상황. 갑자기 두 친구의 목소리 톤이 높아지더니만 두 사람의 입에서 리얼리티 쇼의 비속어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고개를 확 돌려 두 사람 쪽을 보았다. H와 T는 최고의 욕쟁이 셰프 되기 경쟁이라도 하는 듯이 얼굴을 들이민 상태에서 상소리 난타전을 몇 차례 주고받더니만 상대방의 가슴팍을 동시에 퍽하고 밀쳐냈다. 5초도 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이라 옆에서 말릴 틈도 없었다. 옆의 동료들이 황급히 두 사람을 떼어놓았고 큰 소리를 듣고 선생님이 놀라 뛰어왔다. 싸움이랄 것도 없는 아주 작은 해프닝이었다.
 

퇴교당한 H “그때 왜 그랬을까” 눈물 흘려
 

그날 저녁 나는 H와 T, 단짝들과 함께 런던 시내의 한국 음식점에 모여 소주를 마셨다. 굳이 화해를 할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좋은 친구였고 불같은 주방의 열기에 몽롱해져 아주 잠깐 이성을 잃었을 뿐이었다.
 학교 쪽의 판단은 달랐다. 교내 폭력에 적용되는 르 코르동 블뢰 학칙은 엄격했다. 특히 주방에서의 신체적인 충돌은 경중에 상관없이 무조건 퇴교 조처였다. 주방은 일반 학교 교실과 달리 치명적인 상해를 입힐 수 있는 위험요소가 상존하기 때문이었다. 너무 안타까웠다. 요리에 대한 두 사람의 열정을 잘 알기에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나와 몇몇 친구들이 중심이 되어 구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나는 두 사람을 응원하는 비디오를 만들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비디오를 본 학생들의 지지 댓글이 끝도 없이 올라왔다. 그리고 동기생 50명의 서명을 받고 진정서를 작성해 교장 면담을 신청했다. 퇴교 조처를 철회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를 떠올리게 하는 인상의 그레이 교장의 입장은 단호하고 명료했다. “르 코르동 블뢰는 폭력에 대하여 ‘제로 톨러런스’(Zero Tolerance Rule)의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안전에 관련된 규칙이기 때문에 어떤 예외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주방이라는 스트레스 환경에서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사람은 요리사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결국 H와 T는 퇴교당했다.
 두 사람이 로커의 짐을 빼기 위해 마지막으로 등교하던 날, 우리는 학교 앞 펍에 모여 늦게까지 이별주를 마셨다. H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기가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후회했다. 친구는 그렇게 주방을 떠나야 했다. 욕쟁이 셰프의 리얼리티 쇼처럼 멋있는 퇴장은 아니었다.
  
 글 KBS PD(www/kbs.co.kr/cook), 일러스트레이션 김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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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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