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적 고민 빠뜨린 ‘쓰나미케이크’

박미향 201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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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통성 없는 파티스리 수업에서 인생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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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스리(제과제빵)의 세계는 퀴진(요리)과 너무도 달랐다. 마치 다른 중력의 법칙을 가진 은하계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파티스리에서 레시피는 바이블이자 꾸란(코란)이다. ‘경전’과 토씨 하나라도 다르게 조리하면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이 찾아온다. 예를 들어 레시피에서 달걀노른자 80g만 넣으라면 노른자를 쪼개서라도 꼭 그만큼만 들어가야 한다. 설탕을 그랑 수플레 만드는 데 116도로 끓이라고 쓰여 있으면 온도계로 정확히 116도가 될 때까지만 끓여야 한다. 잠깐이라도 온도계에서 눈을 떼고 있다 정해진 온도를 넘겨버리면 설탕시럽은 ‘추억의 달고나’가 돼버린다. 사소한 도구 하나라도 정해진 룰을 철저히 따라야 한다. 퀴진 과정에서야 감자껍질을 벗길 때 필러든 나이프든 상관없다. 하지만 파티스리는 주걱으로 섞어야 할 반죽을 깜빡하고 위스크(whisk·거품기)로 뒤섞어놓으면 케이크 대신 납작한 호떡이 나온다.
 더 가혹한 것은 파티스리는 초반 실수가 복구되지 않는다는 거다. 퀴진 수업 때는 안 그랬다. 조리과정 초반에 실수를 해도, 요령만 있으면 ‘식용가능한’ 수준 정도까지 기사회생이 가능했다. 라면국물이 짜면 물을 더 부어 간을 맞추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파티스리에서는 9회말 역전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다. 타르트든 케이크든 반죽이 제대로 안 된 채 오븐에 들어가면, 그걸로 끝이다. 우연이나 기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티스리 첫 실습시간, 담당 셰프가 들어오는데 인상이 범상치 않다. 짧게 올려친 머리 스타일, 다리미로 잘 다려 날이 바짝 선 셰프 재킷, 마른 얼굴에 파란 광채를 뿜는 매서운 눈매. 도저히 달콤한 디저트와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이미지, 뭐랄까, 해병대 신병훈련소의 깐깐한 주임상사 같은 스타일이었다. 나는 다른 은하계(퀴진)에서 건너온 신분인지라 더 긴장됐다. 셰프에게 좋은 첫인상을 주려고 출석체크 때 일부러 큰 소리로 대답했다. “위, 셰프! Oui, Chef!”
 

파티스리 셰프는 깐깐한 주임상사 스타일
 

첫 수업 과제는 파이핑. 원추형 종이 또는 플라스틱 백에 생크림 등을 넣고 짜서 모양을 만드는 작업이다. 파티스리의 기본 중 기본인 테크닉이다. 먼저 셰프가 베이킹 종이를 가위로 오려 작은 고깔모양의 파이핑 주머니를 만들었다. 20초도 안 걸려 기계에서 뽑아져 나온 듯 완벽한 주머니가 완성됐다. “파티셰가 되려면 앞으로 이런 파이핑 백을 수백, 수천개 만들게 될 겁니다. 두 눈 감고 발가락으로 접을 수 있을 정도로 연습하세요.” 셰프가 시범을 보일 때는 세상에 저렇게 쉬운 게 있나 우습게 보였는데 막상 만들려 하니 종이를 어떻게 접었는지 하나도 생각이 안 났다. 천신만고 끝에 어렵게 하나는 겨우 완성했는데, 모양이 엉성하기 이를 데 없어 정말 발가락으로 해도 별 차이가 없을 듯 보였다.
 ‘그래, 디자인은 삼류지만 기본 기능은 하겠지.’ 녹은 초콜릿을 파이핑 백에 가득 채워 넣고 연속 리본 모양을 만들어 볼 요량으로 눌러 짜기 시작했다. 주머니 위로 따뜻하고 푹신한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1.5초 정도, 황홀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런, 파이핑 백은 갑자기 잔디밭의 자동호스라도 된 것처럼, 사방으로 짙은 갈색의 초콜릿 액체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끈적끈적한 초콜릿이 옆자리 포르투갈 여학생의 유니폼 위로 사정없이 날아갔다. 잭슨 폴록의 후기 추상 작품에서 본 듯한 난해한 점과 선들이 새하얀 재킷 위로 흩뿌려졌다. 여학생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셰프가 달려와 소리질렀다. “테러리스트! 테러리스트!” ‘아니, 왠 난데없이 테러리스트?’ 나중에 알았지만 이 ‘해병대’ 셰프는 실수한 학생에게 이렇게 고함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더니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오우, 퀴지니에, 퀴지니에~!”(이런 요리학과 녀석, 내 이럴 줄 알았어!)
 테러리스트 명단에 오른 뒤, 절치부심하며 명예회복의 기회를 노렸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과일무스 케이크를 만드는 날이었다. 너무 달지도 느끼하지도 않고 과일 맛이 상큼해 평소 좋아하던 디저트였다. ‘오케이, 많이 먹어본 사람이 제대로 맛을 낼 수 있다!’ 반죽을 오븐에 넣고 굽는데 제법 스폰지가 잘 부풀어올랐다. 달짝지근한 버터향이 섞인 케이크 굽는 냄새가 새어 나오자 군침이 확 돌았다. 그사이에 스폰지 위에 올릴 과일무스 만들기에 들어갔다. 먼저 생크림을 휘핑해서 솜사탕처럼 부풀어오르게 한 뒤 설탕과 데운 우유, 달걀노른자로 만든 커스터드와 새콤한 과일 퓌레, 그리고 무스의 형태를 유지해주는 젤라틴을 큰 믹싱 볼에 넣고 섞었다. 그리고 스폰지 둘레 위에 원형 케이크 틀을 씌우고 과일무스를 올린 뒤 냉장고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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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크 망치고 수수께끼 같은 죄의식에 빠졌다
 
 

20여분 뒤 셰프가 냉장고에서 직접 케이크를 하나씩 꺼내면서 주인 이름을 불렀다. 틀이 벗겨지고 라즈베리 빛깔의 무스가 올라간 먹음직스런 케이크가 테이블에 올려질 때마다 탄성이 일었다. 수술실 밖에서 대기하는 보호자의 심정이랄까, 수험생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학부모의 심정이랄까, 그런 애절한 마음으로 내 케이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셰프가 나를 노려보며 고함쳤다. “테러리스트! 이리 와봐!”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냉장고 앞에 달려갔다. 그곳에는 붉은빛 무스가 마치 쓰나미처럼 녹아내리고 있는 형체 모를 빵 덩어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분명 내 ‘새끼’였다. 젤라틴이 문제였다. 4개 반을 넣어야 하는데 실수로 2개 반을 넣었던 것이었다. 결국 나는 ‘해병대 셰프’의 알카에다 핵심멤버 리스트에 오르게 됐다.
 녹아내리는 과일무스 케이크를 응시하며, 그 와중에도, 인생의 두 가지 방식을 놓고 실존적 고민에 빠졌다. 인생은 퀴진적인가, 파티스리적인가? 내 멋대로 살아도 인생 후반전에 되살아날 수 있는, 항상 가능성이 존재하는 열린 세계일까, 아니면 씨앗 뿌린 대로 거둘 수밖에 없는, 결국 정해진 법칙에 따라 결말 나게 되어 있는, 닫힌 세계일까.
 실은 내가 ‘쓰나미 케이크’를 만든 바로 다음 주, 일본 동북부 대지진이 발생했고 사상 최악의 쓰나미가 해안을 휩쓸었다. 수수께끼 같은 두려움과 죄의식으로 괴로웠다. 만약 다음번 케이크를 태워먹기라도 한다면…. 아아~ 인류의 종말을 막기 위해서라도 나는 온전한 케이크를 구워야 했다.

글 KBS PD(www.kbs.co.kr/cook) 사진 최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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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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