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메밀냉면, 등심보다 한수 위

예종석 2008.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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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석의 맛있는 집]  서울 도곡동 벽제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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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소바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냉면이 있다. 냉면이 요즘은 여름음식으로 알려졌지만 동국세시기에는 겨울철 시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연세 높으신 실향민들 중에는 옛날 이북에서 추운 겨울밤에 덜덜 떨며 얼음이 둥둥 뜨는 동치미에 말아먹던 냉면 맛을 잊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 냉면의 본고장인 평양엘 얼마 전에 다녀왔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갖은 노력 끝에 평양의 유명 식당 세 곳에서 네 끼나 냉면을 먹을 수 있었다. 마침 대대적인 수리 중이어서 아쉽게도 그 유명한 옥류관에는 갈 수 없었지만 “수령님께서 랭면으로 옥류관과 경쟁하라는 교시를 내리셨다”는 청류관과 민족식당, 고려호텔의 냉면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론은 실망이었다. 메밀향 가득한 냉면의 원형을 기대했건만 그곳 냉면의 면은 전분 함량이 높아 쫄면 같았고, 육수는 동치미 국물이 많이 들어가서 고기육수에 익숙한 입에는 성이 차질 않았다. 하도 아쉬워서 고려호텔 식당 종업원을 붙들고 메밀 많이 들어간 냉면은 없냐고 물었더니 요즘 사람들은 그런 냉면을 안 찾는데 굳이 원하면 해 줄 수는 있다고 해서 어렵사리 부탁을 한 끝에 다음날 순면 한 그릇을 겨우 얻어먹을 수 있었다.


하긴 냉면에 원형이 어디 있겠는가. 음식이라는 게 경제사정과 재료의 가용성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아니던가. 원래 가정에서 그때그때 있는 재료로 해 먹던 음식이니 정해진 조리법이 있을 수 없다. <규합총서>나 <시의전서>, <규곤요람> 등 조선시대의 조리서에도 냉면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있으나 면의 메밀 함량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술이 없다. 오히려 일본에는 1624년에 조선에서 건너가 20년 동안 남도동대사에 머무르며 메밀국수 만드는 법을 전수했다고 알려진 원진 스님의 메밀가루 8, 밀가루 2의 비법이 오늘날까지 니하치(2:8) 소바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기록에는 1985년 북한에서 나온 <사회주의 생활문화백과>에 메밀가루와 감자농마(녹말)를 5 대 1 비율로 반죽한다는 대목이 보이는 정도다.

 

yeah.jpg요즘은 수확량이 적고 가격이 비싸서 그런지 메밀 함량이 높은 냉면 만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런데 최근에 아주 괜찮은 냉면을 발견했다.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있는 벽제갈비가 바로 그 집이다. 벽제갈비는 맛있고 비싼 고기로 이미 널리 알려진 집이다. 그러나 이 집의 냉면 맛은 최고라고 알려진 주된 메뉴 ‘설화등심’보다도 한수 위다. 봉평메밀 100% 반죽으로 뽑은 면에는 메밀향이 가득하다. 육수도 고기냄새가 너무 진하지도 옅지도 않은 것이 면과 아주 좋은 조화를 이룬다. 웃기로 얹은 얼갈이배추김치는 그 맛이 절묘해서 종업원 눈치를 보면서 자꾸 더 시켜 먹게 된다. 1만1000원에 봉사료와 세금이 더해지는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그 값을 한다. 전화번호는 02)2058-3535이며, 지하철 3호선 도곡역 4번 출구에서 가깝다.

 

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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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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