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 밟듯 산책하라, 촉촉한 와인처럼 

손용석 2009.01.16
조회수 11224 추천수 0
와인칼럼니스트 손용석씨가 지난 5년 동안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유명 와이너리(와인 양조장)들을 둘러보고 갖가지 와인들을 시음한 경험들을 몇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토스카나 양조장 ①
애호가의 ‘로망’…한 모금에 수백년 역사 ‘음~’
포도밭 정원 삼아 우아한 식사 곁들이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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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양조장 순례엔 성경 대신 양조장이 표기된 지도가 필요하다. 성배 대신 와인잔을 들고, 참배 대신 시음을 통해 수백 년에 걸친 이탈리아 와인의 역사를 맛볼 수 있다. 유럽 남부의 강렬한 햇살,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 그리고 양조장에서 맛본 와인 한 잔은 평생 잊지 못할 낭만이 된다.
 
국토 전역이 ‘와인의 땅’
 
토스카나의 시골길은 운전하기가 쉽지 않다. 흙먼지로 풀풀 날리는 꼬불꼬불 시골길을 가다 보면 강원도에서 운전병으로 군용트럭을 몰았던 필자도 멀미가 난다. 이탈리아어로 작성된 지도와 씨름하다 보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토스카나의 전원 풍경은 어느새 창밖 딴 세상이 된다.
 
토스카나의 몬탈치노에 있는 한 와인 양조장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몬탈치노로 빠지는 표지판을 놓친 필자는 같은 길을 몇 번이나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해가 기울고 날씨는 서늘했지만 어느새 티셔츠는 땀으로 범벅이 됐다.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 길가에 차를 세웠다. 한참 지도를 보다 고개를 들었더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낭만은 항상 이럴 때 찾아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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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석 차창으로 눈을 돌리자 포도밭 지평선 너머 하늘엔 붉은 태양이 걸려 있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기보다는 가방 속 카메라를 꺼내 차에서 내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포도나무 그림자는 길게 누워지고, 세상은 점점 빨갛게 물들어 갔다.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생각났다. ‘바로 이 순간, 누가 와서 내 모습을 그려주면 좋겠다. 나무와 노을, 그리고 포도밭과 내가 들어가 있는 그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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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여행을 좋아하고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외국 현지의 양조장 투어는 이른바 성지 순례와 같다. 특히 전 세계 와인 생산국 중 이탈리아는 와인 애호가에게 로망 그 자체다. 이탈리아는 남부 시칠리아부터 북부 피에몬테까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토 전역에서 와인이 생산되는 나라이자, 그리스인들이 ‘와인의 땅(Oenotria)’이라 부를 만큼 와인 강국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와인 산지가 도시를 끼고 있어 이탈리아 관광을 함께 즐길 수 있다.
 
도시 자체가 ‘르네상스 박물관’인 피렌체에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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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와인 여행의 출발지로 각광받는 곳은 피렌체. 토스카나 주도이기도 한 피렌체는 로마에서 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예술의 도시다. 시청 앞 다비드 상을 비롯해 사랑의 여신 비너스상을 소장한 우피치 미술관, 일본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에 등장한 두오모 성당을 갖추고 있어 도시 자체가 ‘르네상스 박물관’이라고 불린다. 피렌체 시내에 줄지어 늘어선 중세식 건물들은 페라가모를 비롯한 세계적인 명품들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피렌체 관광은 미술과 쇼핑이 어우러져 최고의 호사가 된다. 이처럼 화려한 피렌체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와인 양조장 투어다. 피렌체를 둘러싼 키안티, 몬탈치노, 몬테풀치아노 등은 최근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적인 와인 산지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피렌체에서 차를 몰고 두 시간 남짓 남쪽으로 가자 차창 밖은 어느새 온통 포도밭 물결이 된다. 로맨틱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구불구불한 포도밭 구릉 지대를 헤쳐가자 ‘키안티’, ‘키안티 클라시코’ 등 낯익은 이름들이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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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급 와인 산지들이 즐비한 토스카나에서도 가장 먼저 가봐야 할 곳은 ‘중세의 맨해튼’으로 불리는 시에나에서 차로 한 시간 가량 떨어져 있는 몬탈치노란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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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탈치노 입구에 들어서면 멀리 언덕 중턱에 오래된 고성이 보인다. 바로 이탈리아 최대 와이너리 중 하나인 카스텔로 반피(Castello Banfi)다.
 
재래식 방식 벗고 유수학자 불러모아 세계의 중심으로
 
반피는 1990년대 세계 시장에서 맥을 못 추던 이탈리아 와인을 단숨에 세계 와인 업계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주역으로 평가받는 와인 회사다. 70년대 말 이 회사를 세운 반피의 존 마리아니 회장은 78년 몬탈치노 와인의 가능성을 보고 형제들과 함께 반피를 설립했다. 그는 전통에 얽매인 재래식 와인 생산방식에서 탈피해 정교하고 현대적인 와인을 빚어내기로 맘먹었다. 세계 유수의 와인 양조학자들을 불러들여 산지오베제 품종과 포도밭을 심층적으로 연구했다.
 
그 결과 탄생한 와인이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BDM)’. 몬탈치노에선 이탈리아 포도 품종인 산지오베제를 브루넬로라고 부른다. 현재 BDM 와인은 프랑스 그랑 크뤼 와인과 함께 세계 고급 와인 시장을 선도해 나가고 있다. 미국 와인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는 “수많은 브루넬로 와인이 있지만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미국인이 소유한 카스텔로 반피 브랜드는 오랫동안 ‘전 세계 최고의 브루넬로 와인’으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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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에서 반피는 단순히 와인만 유명한 양조장이 아니다. 반피 양조장은 토스카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 명소다. 중세 시대 웅장한 반피성 안에 들어서면 세계 유일의 글라스 박물관이 있다. 1층엔 프랑스 요리 평가 잡지인 <미슐랭>으로부터 별을 받은 주방장을 영입한 레스토랑까지 두고 있다. 처음엔 와인 마니아들의 발길이 잦아졌다가 지금은 매년 전 세계 4만 명 이상의 와인 애호가와 미식가들이 몰려드는 유명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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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를 비롯해 프랑스에 있는 와인 양조장은 반피처럼 대부분 성을 끼고 있다. 지금은 양조장을 일컫는 이탈리아어 카스텔로나 프랑스어 샤토의 원래 뜻도 성(城)이다. 예부터 그 지방 성에 살던 지주들이 포도밭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와인 양조장을 찾는 관광객들은 오래된 고성도 함께 둘러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또하나의 필수는 포도밭 직접 걸어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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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의 양조장에 가면 와인을 맛보는 것 말고도 반드시 해봐야 할 일이 있다. 바로 포도밭을 직접 걸어보는 일이다. ‘공기를 밟듯이 산책하라’는 토스카나 도보 여행의 원칙을 따르며 사뿐사뿐 포도밭을 밟아 보자. 아침이라면 자욱한 안개 사이에 펼쳐진 포도밭엔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 외엔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이탈리아 명품 토즈의 CEO로 최근 토스카나에서 양조장을 사들인 스테파노 신치니 씨는 “아무런 소음이 없는 포도밭에 있다 보면 내가 도시에서 얼마나  많은 소음에 시달렸는지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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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을 걷다가 반피의 와인을 직접 맛보고, 구입할 수 있는 와인 가게를 들렀다. 가게 안엔 항상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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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저장고에서 방금 꺼내온 반피의 BDM 한 모금은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코 끝을 스치는 향에서는 방금 걸었던 포도밭의 자갈 흙내음이 물씬 풍겼다. 입안에 들어가자 아직 어리지만 왠지 모를 묵직함이 배어 있었다. 프랑스의 와인과는 확연히 다른 과일향이 느껴졌다. 시음을 마치고 양조장을 빠져나왔지만 머릿속엔 반피의 향과 맛이 맴돌았다.
 
이탈리아 양조장은 대부분 와인 제조 과정을 들으며 테스팅을 할 수 있는 시음장을 갖추고 있다. 일부 양조장의 경우 미리 예약을 하면 와인 관계자와 포도밭을 정원 삼아 우아한 식사도 할 수 있다. 차를 빌리지 않아도 피렌체 시내의 관광안내소에 가면 인근 양조장 견학할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을 신청할 수 있다. 물론 명품 양조장은 수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방문할 수 있다. 포도를 수확하는 가을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양조장은 방문자를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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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손용석(와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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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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