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더 천천히 와인도 내 걸음도 

손용석 2009.03.23
조회수 9427 추천수 0
토스카나 양조장 ②
넘실거리는 포도밭과 광장에서 즐기는 ‘망중한’
차로는 못가는 오르비에토 곳곳엔 여유가 넘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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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 여행의 매력은 마을 순례에 있다. 토스카나 마을은 저마다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포도밭이 즐비한 시골이지만 눈과 입이 심심하지가 않다.
 
운수 나쁜 날은 광장서 소매치기 당할 수도
 
먼저 토스카나 와인의 대명사인 키안티와 키안티 클라시코에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원 풍경으로 꼽히는 낮은 포도밭 구릉이 넘실거린다. 곳곳에 숨어 있는 양조장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와이너리에 따라 지하 와인 저장고나 포도밭 전경이 펼쳐진 야외에서도 시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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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탈치노와 몬테풀치아노에 가면 고급 와인 본산지답게 식도락 여행에 어울릴 법한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와인숍을 일컫는 에노테카에선 최근 유행하는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와인부터 자신의 생년보다 빨리 만들어진 산지오베제 와인을 만날 수 있다. 여기에 돼지머리를 걸어놓은 정육점에서 파는 살라미는 와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안주다. 살라미는 말린 햄의 일종으로 돼지고기를 공기 중에 말려 발효시켜 만든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서도 치즈와 함께 와인의 찰떡궁합 음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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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산지미냐노와 시에나엔 수백 년 전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을 주는 토스카나 오래된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골목으로 빠지면 수십 년 된 레스토랑과 바들이 지친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특히 산지미냐노의 광장에 있는 명물 아이스크림 가게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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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각양각색의 모습을 지닌 토스카나 마을들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바로 광장이다. 이탈리아에 가면 아무리 조그만 마을이라도 광장이 있다. 이 광장에서 이탈리아인은 이웃 주민들이나 친구들을 만나 상대의 안부를 묻는다. 관광객이라면 운 좋은 날엔 광장 한가운데서 펼쳐지는 광대들의 놀음을 만날 수 있고, 운이 된통 없는 날이면 소매치기를 당하게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광장을 낀 이름 모를 카페에 앉아 즐기는 망중한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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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시티’답게 화이트 와인 맛도 순수
 
와인과 슬로우 여행의 참맛을 동시에 즐기려면 도보 여행의 천국이라 불리는 오르비에토를 빼놓을 수 없다. 로마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오르비에토는 해발 250미터의 고지에 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차를 타고 마을에 들어갈 수 없다. 입구에서 차량 출입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은 이처럼 어이없는 상황에도 아무런 불평 없이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일부에선 ‘관광객으로 먹고 살 법한 동네가 차량 출입을 막냐’며 투덜거린다. 하지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따라 시내를 걷다 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그 여유가 주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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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비에토는 1980년대부터 버스와 자동차 무게 때문에 지반에 문제가 생겨, 케이블카를 운행했다. 외지인들은 마을에 가려면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했다. 정부에선 이런 불편함을 오히려 홍보로 활용했다. 중세마을을 보전하고 환경을 지키기 위한 정책을 더욱 펼치며 오르비에토를 ‘슬로우 시티’의 발상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오르비에토에선 패스트푸드점이 없는 대신 생긴지 100년은 넘어 보이는 빵집들이 즐비하다. 슈퍼마켓이 없는 대신 매주 재래시장이 열려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공급한다. 거리에서도 여유가 넘친다. 자동차가 없어진 자리엔 산책하는 마을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들어섰다. 카페나 레스토랑에서도 매연 걱정 없이 삶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주목받고 있는 오르비에토지만 와인 애호가에겐 화이트 와인 산지로 더 유명하다. 질 좋은 레드 와인으로 알려진 이탈리아에서 오르비에토만큼은 화이트 와인 대국인 프랑스와 독일도 인정한다. 오르비에토의 화이트 와인은 그 동네를 닮았다. 높은 해발의 마을 비탈에서 태어난 와인은 달콤함 대신 산도와 신선함을 뽐낸다. 양조 과정에서도 ‘슬로우 푸드’답게 인공적이거나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해 순수한 맛을 강조한다. 마치 오르비에토만의 테루아(terroir)가 고스란히 배인 느낌이다.
 
전 세계 슬로우 관광객들과 와인 애호가들의 발길을 사로잡아온 오르비에토에선 매달 각종 와인 시음회와 축제가 열린다. 필자 역시 오르비에토 인근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시음하는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와인의 맛은 기호의 차이일뿐 ‘맛없다’는 실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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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들어섰더니 양조장별로 다양한 부스가 차려져 있었다. 잘 차려 입었지만 왠지 친숙해 보이는 이탈리아 노신사가 운영하는 부스로 갔더니 까만 머리의 동양인이 신기했는지 연신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한국에서 와인 관련 글을 쓴다”고 답했다. 그는 갑자기 두 가지 와인을 꺼내더니 마셔보라고 했다. 물론 처음 맛보는 오르비에토 지방의 와인들이었다.

 그 : “어떤 게 더 맛있니?”
 나 : “A가 좋네요.”
 그 : “그럴 줄 알았어.”
 나 : “무슨 말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 : “A가 더 비싸. 각종 국제 대회에서도 메달도 땄지.”
 나 :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럼 A가 좋은 거네요.”
 그 : (못마땅하게) “그런데 넌 지금까지 오르비에토의 와인을 마셔본 적이 있니?”
 나 : “별로 못 마셔봤죠.”
 그 : 너 같은 외국 사람들과 달리 대부분의 이탈리아인들은 B를 더 좋아해.
 나 : ...
 그 : 요즘 이탈리아 와인은 너무 외국인 입맛에 맞춰 만들어지고 있어. 그 외국인들은 오르비에토의 자연을 잘 살린 와인이 어떤 것인지 잘 몰라. 그러다 보니 오르비에토 전통 와인들은 자리를 잃어가고 있어. 그게 난 너무 슬퍼.
 
와인 맛도 모르는 놈이 잘난 척하다가 혼난 느낌이었다. 와이너리를 다니면서 다양한 와인을 마시게 된다. 이때 피해야 할 금언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와인이 맛없다’는 말이다. ‘맛없다’라는 평가는 와인 생산자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이다. 어떤 사람에게 ‘맛없는’ 와인이 다른 사람에겐 ‘최고의’ 와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와인업계에선 “세상에 맛없는 와인은 없다, 단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와인이 있을 뿐이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동네가 바로 토스카나다. 그래서 토스카나에선 무턱대고 마시는 와인들의 우열을 정하는 것도 실례가 된다. 와인 메이커들은 A가 좋다든지 B가 좋다든지 하는 말보다는 각각의 와인이 가진 장단점을 듣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작은 마을서 복작대는 애호가들은 ‘슈퍼 투스칸’ 시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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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정말 좋아한다면 볼게리나 마렘마로 가는 것이 좋다. 특히 볼게리는 전세계에 싸구려 와인으로 인식되던 이탈리아 와인을 일약 고급 와인 이미지로 바꿔버린 사시카이아의 고향이다. 지금은 사시카이아 뿐만 아니라 오넬라이아 등 슈퍼 투스칸들이 즐비하게 생산된다. 사시까이아(Sassicaia)는 저가 와인으로 유명하던 이탈리아의 이미지를 일약 명품 와인 생산지로 탈바꿈시킨 와인이다. 토스카나(Toscana)에서 생산되지만 토착 포도품종인 산지오베제가 아닌 국제적인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품종으로 만들어 토스카나를 넘어선 ‘슈퍼 투스칸(Super Tuscan)’ 와인으로 불리며 출시되자마자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다. 지금도 최근 빈티지가 수 십 만원, 최고의 와인들이 생산되던 80년대 초중반 와인은 돈을 줘도 못 구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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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게리로 가는 길은 입구부터 범상치 않다.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도로 양 옆에 끝없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마을에 도착하고 나면 대부분 그 마을 크기에 실망하곤 만다. 이탈리아 고급 와인 본산지지만 마을을 한 바퀴 다 돌아봐도 30분이면 충분할 정도로 작기 때문이다. 그러나 와인 마니아들에겐 30분이 아니라 3시간도 부족한 동네다. 작은 마을 구석구석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레스토랑은 물론, 다양한 슈퍼 투스칸 와인을 판매하고 있다. 특히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와인숍에선 사시카이아나 오넬라이아를 ‘잔술’로 마실 수도 있다. 그래서 볼게리 와인바엔 테이블마다 수많은 슈퍼 투스칸을 놓고 그 차이를 시음하는 애호가들로 항상 북적거린다. 
 
글·사진 손용석(와인칼럼니스트)
 
이사진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필자의 허락이 없이 사용하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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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이메일 : mh@hani.co.kr       트위터 : psol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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