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선물> 김칫독 가는 길

조회수 8341 추천수 0 2012.12.10 16:42:50

  어스름한 마당 뒷켠에 묻혀있는 김칫독에 김치 꺼내러 가는 길은 늘 으슬으슬했다. 딱딱하고 차가운 슬리퍼가 겉돌지 않게 잘 걸어야하기도 했다. 눈이 온 날이면 눈 덕분에 환해진 '김칫독 가는 길'은 무섭지도 않고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나만의 몫이기도 했다. 

  '아, 난 지금 이 순간을 어른이 돼서도 추억할 수 있을 거야.' 혼자 뿌듯해하며 미소 지을 정도로.

  그런 날이면 독 뚜껑의 눈을 살살 치워주고, 더 살살 김치를 꺼냈을 거다.  하얀 눈길 위에 붉은 김치 국물이 톡 떨어지기도 했겠지. 김치더미 속에 박아놓은 갈치토막이 탱탱하게 딸려오면 흠칫 놀라기도 했었을 거다.

  우리는 무서워서 젓가락이 닿는 것도 싫어했던 생갈치토막을 엄마는 김치랑 같이 드시기도 했었다. 갈치 덕분에 김치맛이 시원한 거라고 하셨고, 우리도 그 덕분인 건 익히 알았었다. 김치가 너~무 맛있었으니까. 게다가 우리가 마늘 불려 까고, 찧고, 무 씻고, 채 썰고, 또 절인 배추 씻는 건 얼마나 지루하고  손시려웠는데. 마지막 김칫독까지 김치 나르는 것까지.....  우리 엄만 어린 딸들 데리고 겁없이 큰일 많이 치루셨다. 암튼 내 몸삯이 들어간 김치니 더 맛있어야 하는 까닭도 있었겠고, 어쨌든 우리집 김치는 시원하고 참 맛있었다.

  그렇게 땅에 묻힌 독 속에서 익은 김치의 풍미는, 어언 삼십몇년 전의 기억이지만 고스란히 떠오른다.  김치를 꺼낼 때부터 풍기는 새초롬하면서 깊은 냄새, 묵직하니 차가운 촉감, 충분히 숙성된 그윽한 색감에 아작거리며 입 속 소스라침을 일으키는 맛!   비교불가한 땅 속 김칫독 김치만의 필요충분 초건이다.  십수년에 걸친 해마다의 김장김치들이 있었지만 오로지 단 하나의 맛 자체로 기억될 뿐이다.  바로 땅에서 익어 맛 든 김치의 맛.

  지금은 시골할머니들의 맛깔난 김치들의 집조차 김치냉장고가 되고 필수전자제품이 되면서, 어릴적 살던 서울 변두리 집 마당 한 켠에 있던 김칫독은 이제 시골풍경에도 없는 듯 하다. 땅에 묻힌 김장독 기능을 배운 김치냉장고가 그역할을 충분히 감당하고 있으니 자연도태됐나 보다.

  훗날 마당있는 집에 살게 되면 내가 좋아하는 느티나무랑 라일락 밑에 독 하나 묻어야지 싶다.  날마다 타박타박 김치 꺼내러 가고, 하얀 눈 모자 쓴 독 뚜껑이 예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쳐다보기도 하고, 그러면 참 좋겠다. 

  '김칫독 가는 길'에 담긴 소녀의  추억엔 엄마가 딸들과 함께 한 수많은 연례행사에 대한 기억과  땅의 기운이 선물한 흉내낼 수 없는 참맛이 함께 살아있다.   그 추억이 현실이 되어 김치를 싫어하는 둘째아들에게도 엄마로써 자연의 맛을 선물하는 기회가 주어지고, 그러다 그 아들의 자식이 나와 같은 추억을 기억하게 되는 일도 참 좋겠다.

 

 김선연 / 서울 서초구 반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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