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선물> 진한 보말미역국 한 사발

조회수 9562 추천수 0 2012.08.08 17:27:35

  대도시에서 살아볼 만큼 살아봤고, 회사도 다닐 만큼 다녀 모든 게 지겨워질 무렵, 때마침 병이 생겨준 덕에(응?) 오랫동안 꿈에 그리던 제주로 올 2월에 훌훌 내려왔다. 시골에 거처를 정할 만큼 용감하지는 못해 제주시내에 아파트를 얻어 살고 있지만, 이웃들이 수확해서 나눠주는 채소들을 먹고, 농부님이 자기 밭 앞에서 파시는 참외와 수박의 맛을 알게 되고, 단골 정육점에서 권해 주는 맛좋은 고기를 구워 먹으며 살다 보니, 도시에서 그 맛없는 것들을 그동안 어찌 먹고 살았나 싶다. 특히나 제주의 오일장은 내게 삶의 활력을 주는 보물창고 같은 곳인데, 큰 백화점에나 가야 겨우 구경할 수 있었던 루콜라나 바질 같은 채소들이 턱하니 나와 있질 않나, 제주도 내에서 재배한 야들야들 아스파라거스, 탱글한 블루베리 들이 시시때때로 나를 유혹한다. 딱새우, 성게, 자리돔, 한치, 보말... 낯설었던 해산물 또한 다양하게 맛볼 수 있어 제주로 내려온 이래 나의 식탁은 한층 풍요롭고 재미나다.

  제주 바닷가에서는 시커먼 현무암 틈에서 뭔가를 채취하는 할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중에 하나가 ‘보말’이라는 작은 고둥 종류인데, 전복처럼 죽을 끓여먹어도 좋고, 미역국을 끓이면 진한 바다의 맛이 확 전해진다. 아, 크림 파스타에 넣어 먹어도 맛있다. 비양도에서 맛본 진한 보말죽 맛을 기억하고 있는 터라, 오일장에서 보말을 보자마자 주저 않고 사다가 삶아서 살을 발라 손질해 두었다.

  지난 달, 후배 K가 2박 3일의 제주 출장을 왔다. 문제는 이제 태어난 지 넉 달 된 아기가 있다는 것. 중요한 작가의 취재를 도와야 하는 상황이라 안 올 수가 없는데, 주말에 아기 봐줄 사람을 갑자기 구하기도 난감하고... 후배는 결국 남편을 애보개로 데리고 왔다. 하지만 남편이라고 호텔 방에서 애만 보고 싶겠나. 조심조심 취재 현장에도 함께하기는 했는데, 문제는 밥을 제대로 챙겨먹을 수가 없었다는 거다. 다른 사람이 잠시 돌봐주고 있어도, 낯선 환경에 적응 못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부부는 도저히 밥에 집중하지 못했다. 결국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과 장소란 밤중의 숙소뿐. 부부는 고픈 배를 배달음식으로 때우곤 했다. 아니, 맛있는 음식 천지인 제주까지 와서 이 무슨 고문이란 말인가.

  떠나는 날 아침까지도 부부는 ‘괜히 데리고 왔어’ 하는 후회와 수면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에, 밥을 먹으러 나가느니 잠시라도 눈을 붙이는 게 낫겠다고 했다. 나는 오일장에서 사놓은 생미역과 보말로 진하게 미역국을 끓였다. 살 오른 고등어도 한 마리 오븐에 굽고, 제주산 취나물, 친구네 텃밭에서 얻은 호박 등을 들기름에 달달 볶았다.

  졸면서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던 K는 호텔 문을 열어젖히며 “배달 왔어!” 하는 나를 보고 “엉엉, 선배... 밥이 너무 먹고 싶었어요...” 울먹였다. 부부는 나에게 잠시 아기를 맡기고 정말 맛있게 잘 먹어주었다. 아, 밥 좀 넉넉히 퍼올걸. 모유수유하는 엄마가 얼마나 많이 먹어야 하는지 미처 생각 못했던 손 작은 내가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가을에 다시 한 번 출장와야 하는 K야, 그때는 내가 밥 진짜 넉넉히 해줄게. 통통한 자리돔 굽고, 고소한 성게미역국도 끓여줄게. 아기랑 같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렴!

 

_ 작성자 신수진 dotc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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