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에게 술안주는 음식을 넘어서는 흥취가 있다. 뚜렷한 사계절이 빚어내는 안주의 향연은 원재료의 절정기를 기다리는 즐거움과 절정기를 넘길 때 아쉬움이 교차한다.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아쉬움도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다. 여름을 식히는 맥주는 굳이 안주가 필요할까 싶지만 “치맥” 열풍을 마다할 필요는 없다. 가을 전어로 한 잔 하면 단풍을 보지 않아도 몸안에 가을이 들어온다. 엄동설한에는 고기안주에 따끈한 국물이 곁들여지면 그만이다. 계절이 지나가면 안주를 향한 아쉬움을 미끼로 세월을 낚는다. 세상만사가 그러하듯이 안주의 제맛을 보려면 때를 기다려야 한다.
굴보쌈은 따끈한 국물은 아니지만 겨울에 먹기 좋다. 신선한 굴을 맛보기 위해서는 좀 쌀쌀해야 제격이다. 살과 비계가 적당히 섞인 삶은 돼지고기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면 젓가락으로 새우젓 두 개를 집어 고기 위에 얹는다. 싱싱한 굴을 하나 집어 초고추장을 3분의 1쯤 입혀 고기 위에 올리고, 취향에 따라 마늘이나 고추 편(슬라이스)을 장식하면 굴보쌈 세트가 완성된다. 소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입안은 온통 소주로 가득차 잡맛이 말끔히 사라진다. 바로 이때, 굴보쌈을 한 입에 넣고 가볍게 터트린다. 입안에서 작렬하는 맛의 향연은 온몸으로 느끼는 축제이다. 산해진미(山海珍味) 자체이다.
3월 하순 꽃샘 추위로 아직 겨울이 머물러 있던 즈음, 우연히 절친 둘과 종로에서 만나게 되었다. 약속 장소를 물색하다 보니 굴보쌈으로 유명한 맛집이 눈에 들어왔다. 옥호에서도 굴보쌈이 여실히 드러났다.(삼해집; 보쌈+굴) 인터넷 댓글은 칭찬 일색이다. 굴보쌈을 시키면 감자탕이 서비스로 나와 따뜻한 국물까지 갖추니 완벽했다. 가격도 착한 편이어서 친구들과 한 잔 하기에 적당했다. 눈이 커지고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겨울의 꼬리가 늘어진 쌀쌀한 날, 굴보쌈을 먹기에 더없이 좋았다. 천우신조라던가 하늘과 친구가 돕는 형국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 겨울을 지루하게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더욱 댕겼다.
약속 시간에 1시간 가량 늦게 도착하니 기대와는 사뭇 다르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오랜만이라 친구들은 기분이 좋아 보였고, 한 녀석은 횡설수설 했다. 그새 소주병이 비어있었다. 자리에 앉는데 굴보쌈이 보이지 않았다. 썬버너 철판냄비 위에 주꾸미 비슷한 것이 고추장 속에 파묻혀 있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칙칙해졌다.
“굴보쌈 안시켰어?”
“ㅇㅇ가 돼지고기 안받아서 이거 시켰어”
“․․․이 집은 굴보쌈인데․․․”
안주를 하나 더 주문하기로 했다. 셋중 하나가 돼지고기 못먹는다는데 차마 굴보쌈을 시키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녀석이 알아서 시켜주기만 바랐다. 녀석은 알지 못했다. 취기가 오른 친구들은 기대를 저버리고 옥신각신했다. 굴보쌈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결국 메뉴판 구석에 숨은 감자탕을 찾아내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굴보쌈 시키면 감자탕은 서비슨데...’ 나만 두 눈이 말똥했다.
다른 테이블을 둘러보니 굴보쌈 아닌 자리가 없었다. 굴보쌈을 먹지 못한다는 생각에 순간 울컥해졌다. 친구가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고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었다. 이 시대의 중년 아니랄까봐 온통 자식 얘기다. 가끔 왕년 운운하는 옛날 소시적 얘기가 양념으로 섞인다. 친구들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흥이 나고 우리들의 삶을 서로 엿보는 얘기들로 안주삼아 술에 취한다. 우리들의 대화가 굴보쌈보다 더 맛있는 안주가 아닐까. 다음엔 친구들에게 우정만큼 맛있는 계절의 진미를 찾아주고 싶다.
이상후 010-6349-2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