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고향 어머니가 해주시는 김치를 먹는다. 다행히 아내도 젓갈류를 넣고 푹 숙성시킨 김치보다 싱싱한 야채 식감이 살아 있는 김치를 좋아하는 지라 고향 김치는 쉽게 식탁의 중심에 입성했다. 그런데 한 달 전쯤인가부터 작년 늦가을에 공수해 온 김장 김치가 급격히 신 맛을 뿜었다. 장모님 전언에 따르면 텔레비전을 옮기네 마네 하면서 이틀 동안 김치 냉장고의 코드가 뽑힌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냉장고가 초기화 되면서 강냉에서 저냉으로 전환된 것을 너무 늦게 발견했다. 김치의 신맛은 매운 맛과 뜨겁게 조리하면 대개 시원해지기 마련인데, 어떻게 요리해도 강한 신맛의 위엄은 도무지 줄지를 않았다.
인터넷을 뒤졌다. 몇 가지 제안의 핵심은 중학교 때 배운 산과 염기의 중화 반응이었다. 신맛의 주범인 산의 수소이온에 염기의 수산화 이온을 결합시켜 물로 만드는 것이다. 천연 염기성 재료로는 조개껍질, 달걀 껍질, 게 껍질 등이 있었고 소다를 몇 스푼 넣으라는 제안도 있었다. 그 중 달걀을 선택했다. 달걀을 세 개 정도 삶아 김치통에 넣었다. 그리고 그러는 김에 김치 한 통을 썰어 찌개를 끓였다. 구워 먹고 남은 돼지 삼겹살과 양파 한 개, 고춧가루, 마늘, 황설탕, 새우젓 등을 넣고, 중화반응을 위해 국물용으로 사용되는 냉동 게 한 마리를 넣었다. 그리고 고온에서 중화반응을 지속시키려는 심정으로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끓였다.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신맛의 위엄은 국물의 시원함과 달콤함으로 전환되었다. 아내도 장모님도 약간 과장된 감탄사를 국물 맛에 선사했다. 그런데 불쑥 냄비의 외관이 눈에 들어왔다. 결혼 8년차, 8년을 함께 했던 스테인리스 냄비의 밑창이 본체와 분리되기 직전이었다. 살림에 무심한 아내와, 주부도 아니고 전통 가부장도 아닌 어정쩡한 나의 위치가 냄비에 고스란히 고였다. 누군가를 위해, 아니 누군가와 함께 하기 위해 따뜻한 밥을 짓고 뜨거운 찌개를 끓이고 함께 밥을 먹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리라. 어쩌면 이것이 가족 됨의 전부는 아닐까?
김치는 지나치게 숙성됐고, 냄비는 누적된 열에 변형됐다. 그러나 나는 아직 믿는다. 세월이 흘러 상처는 피할 수 없더라도 함께할 의지는 함께할 지혜를 낳는다고. 그리하여 삶은 달걀의 껍질은 김치를 회생시킬 것이며, 새로 살 냄비는 더 세련되고 튼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