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있는 고향집에 입식부엌(참 어색한 단어죠? 입식부엌은 부뚜막이 있는 옛날부엌에 상대되는 말로 한 때 신식부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곤 했던 단어랍니다. 지금이야 시골에도 대부분 입식부엌이라 굳이 입식부엌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답니다.)이 들어온 건 제가 중학교 다닐 때부터였습니다.
그전만 해도 부뚜막이 있는 부엌에서 밥을 짓고 기름 냄새 풍기는 석유곤로를 이용해서 음식을 조리했지요. 스위치만 돌리면 불이 저절로 '착' 하고 붙는 가스렌지가 정말 혁명과도 같은 기계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시골 정지(우리 동네에서는 부엌을 정지라고 합니다.)에서 가장 인상깊게 기억에 남는 건 부뚜막에 걸려 있던 거대하고 시커먼 무쇠 가마솥이었습니다. 어린 송아지가 부뚜막에 앉아 엉덩이가 뜨겁다고 울던 그 부뚜막...(그래서인지 전 그 동요를 들을 때마다 시골집 정지가 생각나요.)
일손이 많이 필요한 모내기나 추수를 하는 날엔 가마솥도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2~30인 분이나 되는 밥을 한 번에 할 때는 부뚜막의 가마솥만한 것이 없었거든요. 커다란 양동이에 쌀을 씻어 안치고 산에서 해 온 장작나무로 불을 때서 가마솥에다 밥을 지으면 무거운 솥뚜껑 사이에서 하얀 김이 픽픽 뿜어져 나왔답니다. 가마솥과 뚜껑 사이에서는 땀이 쏟아지듯 물기가 한 방울 두 방울 배어 나오고, 하얀 김에 묻어나오는 고소한 밥 냄새와 뜸을 들일 때 스멀스멀 새어나오는 밥탄 냄새, 바로 그 누룽지 냄새가 어찌나 그렇게 식욕을 돋구던지. 뜸을 다 들이고 나서 솥뚜껑을 한쪽으로 밀면서 열면 정지 천장을 향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김. 그리고 ‘촤아악’하는 소리와 함께 반짝반짝 빛나는 찰진 밥알들.
무쇠주걱으로 밥을 다 덜어내고 나면 무쇠솥 바닥에 바짝 엎드리고 있는 노릇노릇한 누룽지. 손잡이가 긴 무쇠주걱으로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들어내서 조금씩 조금씩 안쪽으로 밀어 넣으면 동글동글 말리다가 번쩍하고 들려지는 얼굴보다 몇 배는 큰 누룽지.
밥보다는 그 누룽지 한 조각 먹기 위해 밥 짓는 불을 조절하는 아니 마술사처럼 다루는 할머니 옆에 앉아서 이글거리는 아궁이의 뜨거운 잉걸불도 마다하지 않았던 나. 숭늉 만드는 물 붓기 전에 할머니께 따끈따끈한 누룽지 한 조각 받아 입에 쏙 넣으면 바삭거리는 식감과 입안 가득 퍼지는 구수한 내음. 어떤 과자가 이보다 맛있었을까요?
요즘은 그런 가마솥 누룽지를 구경조차 하기 힘들죠. 고향집에 가도 이제 가마솥이 걸린 부뚜막도 없어지고 밥짓는 불의 마법사인 할머니도 기력이 쇠해서 만들어 주실 수 없답니다. 옛날 생각이 나서 압력솥으로 가스불에 밥을 하면서 일부러 조금 태워 누룽지를 만들어 봅니다. 압력솥 바닥을 스테인레스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 보지만 빛깔이나 향이나 맛이 결코 가마솥 누룽지의 맛은 따라 갈 수가 없군요. 아마 맛도 맛이지만 불이 이글거리는 아궁이와 시커먼 가마솥가 없어서 그런 거겠죠? 어디 맛있는 누룽지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