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이 되어 기숙사로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시골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내동 또는 둥디라는 이름답게 우리 동네는 깊은 산속에 있는 그런 산골마을은 아니었지만 나지막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둥지의 형상을 한 그런 마을이었다. 동네 전체로는 오십가구가 넘었지만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집은 열가구 남짓이었다. 시골이라는 말을 할 때 그 속에 여러가지 의미를 동시에 떠올리지만, '인심'이라는 말은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열가구가 사촌보다 가깝게 지내는 우리 동네에는 인심이 차고 넘쳤다. 대문은 늘 열려 있었으며, 이웃의 일은 사소한 것까지 공유되었으며, 이웃집의 아이들은 우리집을 제집 드나들듯 오가던 시절이었다. 친척도 아니었지만 옆집 아저씨는 아제, 옆집 아줌마는 아지매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바로 옆집에 춘식이 아제가 살았는데, 그 아제가 결혼을 하게 되어 동네에 아지매가 한 분 더 늘었다. 그 아지매가 시집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성용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동네에서 오랫만에 태어난 아기는 온 동네 사람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옆집 중학생이던 나는 성용이를 막내 동생삼아 안아주고 자전거도 태워주면서 귀여워했고, 그런 나를 성용이네 아지매도 옆집 아이 이상으로 생각하셨다. 게다가 시골에서 공부를 어느 정도 했던 터라 옆집 아이가 공부를 잘 한다며 기특해하며 각별하게 대해 주셨다.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있던 나는 제법 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하는 일이 잦았고, 독채로 떨어진 내 방의 불빛으로 옆집 사람들은 내가 평소에 몇 시까지 공부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날도 평소와 같은 그런 밤이었다. 밤 열두시가 다 된 시골마을의 여름밤엔 풀벌레 소리를 배경으로 어쩌다가 들리는 뻐꾸기 울음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가족들 모두가 잠든 밤에 나는 여느때와 다름 없이 입시준비로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날 따라 조금 피곤해서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을 청했다. 그런데 의외로 피곤한데도 잠이 잘 오지 않아 계속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불을 다 끄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더 예민해지게 되고, 아홉시만 넘어도 사람의 왕래가 없는 시골 마을에서는 작은 발자국 소리도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법. 게다가 나는 무서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다.
그때였다. '절그럭절그럭', '저벅저벅',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더 내 방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늦은 밤에 불이 꺼진 걸 뻔히 알면서도 우리 집에, 그것도 독채인 내방에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은 더 커졌고 이불 속으로 더 깊이 파고 들었다. '저벅저벅'. 소리는 더 커졌고 마침내 내 방문 앞에서 소리가 멈췄다. 숨을 죽이고 있는데 이번에는 '척', '덜거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헉, 뭐지? 소리를 질러야 하나? 어떻게 하지? 누구야 이 시간에?'하면서 고민하는 순간.
"호근아!"
옆집에 사는 성용이네 아지매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불을 켜고 문을 열었더니, 내 방문 앞 뜨락에는 상보를 덮은 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공부하느라 힘들지? 오늘 성용이 할매 제사 지냈는데, 제삿밥 먹으라고 가져왔다. 상은 내일 갖다 주면 된다."
무심한 듯한 말을 남기고 아지매는 어둠 속으로 총총 사라졌다.
상보를 들추니 나물에 비빈 고슬고슬한 제삿밥과 여러가지 전, 과일과 떡이 한 상 차려져 있었다. 제사 음식을 옆집과 나눠먹기는 하지만 따로 한 상을 차려주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아지매는 내가 밤 늦게까지 공부한다는 걸 알고 조상님께 올리려고 정성스레 지은 밥에 나물을 비벼 우리집까지 들고 오셨던 거였다.
12시가 넘은 늦은 밤이었지만 나는 내 일생에서 가장 맛있는 제삿밥을 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