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함께 먹은 팥시루떡
아침 밥상 앞에서
“스마트폰 바꿔 주시면 좋겠어요.”
“축구화 새로 사야 하는데요.”
“저는 코트하나 사고 싶은데 안 될까요?” 세 아들의 조심스런 요구사항이다.
기분 좋게 “오케이. 오케이” 하지 못했다. 미안한 맘을 들키지 않으려고 “갖고 싶은걸 어찌 다 충족하며 살 수 있겠니...어서 밥이나 먹어...”라고 일축하고서 마음이 편치 못했다.
점심에 해물 수제비해서 먹이며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려고 시장에 나갔다. 값싸면서 싱싱한 해산물을 사려고 시장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떡 냄새가 달콤하게 풍기는 떡집 앞에 멈춰섰다. 때마침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팥시루떡 시루를 엎어서 자르고 있었다. 하얀 쌀가루에 유난히 붉은 팥고물이 너무나 먹음직스러웠다. 순간 하늘나라에 계신 친정아버지가 목이 메이게 그리워 눈물이 났다. 안경 안쪽으로 눈물을 감추고 시루떡 한 덩이를 샀다.
30여 년 전 우리나라의 수많은 딸들이 산업체학교를 찾아 일과 배움의 길을 병행했었다.
그때 나도 “니가 아들이라면 속바지를 팔아서라도 가르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시며 길게 담배연기만 내뿜으시던 아버지와 한숨만 내쉬던 어머니를 떠나 그 길을 갔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해 늦가을 내 생일이었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오후 수업을 위해 학교 갈 준비를 하는데 기숙사 경비실에서 연락이 왔다. 면회를 왔단다. ‘면회 올 사람이 없는데...’ 생각하며 급히 뛰어나갔다. 기숙사 앞 면회실에 빛바랜 한복바지에 오래된 점퍼를 입은 익숙한 차림의 우리 아버지가 앉아계셨다.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시며 “잘 있었냐...? 어디 아픈데는 없냐..?” 하시며 내손을 덥썩 잡으셨다. 그리고 눈가에 물기가 어리셨다. 딸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으셨던지 계속 말씀을 이으셨다. “오늘 니 생일이라 니가 좋아하는 팥시루떡 해갖고 왔다.” 하시며 또 눈가에 물기가 돈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의자에 앉아 “니를 보내고 농사지으려고 초봄에 씨나락(볍씨) 담그면서, 못자리 앉히면서, 모심으면서, 여름뙤약볕에 논매면서, 가을에 나락 타작하면서도 니를 생각했다.... 그리고 엊그제 새나락 방아찧어서 너희 엄마가 어제 밤늦게까지 떡을 쪘다. 맛있게 먹고 아프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나는 할 말이 없고 눈물만 났다. “나는 가 봐야겠다. 막차를 타야 늦게라도 집에 들어갈수 있으니... 어느 부모가 제 자식 잘 가르치고, 좋은 것 먹이고, 고운 옷 입히고 싶지 않겠냐. 니도 커서 자식 낳고 살다보면 우리 맘 알 때가 있을 것이다.” 하시고 집으로 돌아가셨고, 그날 밤 나는 눈물과 함께 팥시루떡을 먹으며 명문여고에 합격을 하고도 가지 못했던 아픔과 미련을 날려버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며 열심히 일과 공부를 병행했었다. 오늘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새삼 공감하면서 또 한 번 눈물의 팥시루떡을 먹는다. 싫다는 아이들에게도 억지로 한쪽씩 먹이고 한 마디 했다.
“너희들도 커서 자식 낳고 살아봐라. 그때는 엄마 아빠 맘 알 때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 유난히 애틋했던 아버지가 정말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