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국시기
추운 겨울 오후, 남쪽으로 자리를 잡은 시골집 마루에는 햇살이 성큼 들어와 온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처마에 대롱대롱 매달린 고드름은 햇볕을 반사하며 수정처럼 빛났고, 마당에 군데군데 고여있던 물은 하얀 점처럼 엷게 얼어 붙어 있었다.
겨울의 끝자락, 먹을 것이라곤 담은 지 두어 달은 지난 신김치와 동치미, 장독대 옆 구덩이에 묻어 두었던 고구마와 감자 정도. 시루를 받쳐놓고 물이 마를 새라 밤잠을 설쳐가며 키워 둔 콩나물. 그리고, 아랫목에 묻어 두었어도 그 온기가 오래가지 못하는 식은 밥 몇 공기.
추운 줄도 모르고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놀다 볼이 발갛게 상기된 손주들은 쩍쩍 갈라진 손을 호호 불며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들어오며 “할매, 배고파!”
할머니는 정지로 내려 가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솥에다 물을 붓고 식은 밥 몇 덩어리는 푹푹 떠서 더한다. 장독대에서 꺼내 온 신김치는 종종 썰고, 감자와 고구마는 모양 나는 대로 자르고 토란이라도 있을라치면 함께 넣는다. 눌러 붙지 않게 기다란 나무 주걱으로 휘휘 저어주며 끓이다 보면, 밥이 불어 죽처럼 되고 김치에서 나온 고춧가루 양념이 퍼진 솥 안은 주황색으로 변해 허연 김을 내뿜는다. 콩나물 한 줌 집어 넣고, 날이 추워 알을 잘 낳지 않던 암탉이 그날따라 달걀 하나 낳아주면, 툭 깨서 풀지 않은 채로 넣고 보글보글 끓인다.
허기에 지친 손주들을 위해 할머니는 커다란 양재기에 국시기 한 가득 채워 상에 올린다. 따스한 햇볕이 드는 마루에 둘러 앉아, 숟가락으로 떠서 후후 불다가 밥알이 튀어 날아 가더라도, 배고픈 손주들은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국시기를 바닥까지 삭삭 긁어 먹고도 배가 고파 ‘한 그릇 더!’를 외치곤 했다. 허기진 배가 채워져서인지, 언 몸이 녹아서였는지, 아니면 할머니의 정성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때는 남은 음식을 한 데 넣고 끓인 꿀꿀이죽과 같은 국시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다.
햇살이 따스한 겨울의 끝자락, 요리하기에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아파트 주방에서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국시기를 끓여본다. 시골집을 떠난 뒤로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국시기. 처음부터 30년 전의 그 맛이 날 리 없다고 생각은 했었다. 할머니의 손맛이 그리웠다.
그래서, 얼마 전 할머니 혼자 살고 계신 시골집에 다녀왔다. 아흔이 훌쩍 넘어 당신 몸 하나 가누기 힘든 할머니께 손자의 추억 따위를 끄집어 내기 위해 그 때 그 국시기를 끓여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대신 할머니 말씀을 따라 내 손으로 국시기 한 냄비 끓였다. 그때처럼 햇살이 따스한 마루에 마주 앉아 국시기 한 그릇 나누어 먹는데, 그저 그런 맛인데도 할머니는 연방 맛있다며 한 그릇을 다 비우셨다.
할머니가 해주시던 그 국시기나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듯, 할머니에게도 그날 함께 먹은 그 국시기가 할머니가 기억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