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우(溪友)가 만든 깊은 맛

조회수 14821 추천수 5 2012.04.07 16:11:33

  ‘느림의 미학’이 이야기의 말머리가 되어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린지 오래다.

 '슬로씨티’에는 발걸음이 뒤끓고, ‘슬로푸드’는 냄비에서 넘쳐나고 있다. 매체들은 바람몰이에 바쁘다. 작년 여름에 열아홉 살 된 자가용을 폐차장으로 보냈다. 자동차가 없는 불편을 잘 견디어 내는 것에 따라, 그만큼의 반대급부가 있다. 걱정은 사라지고 '무자가용 상팔자'의 잇속은 되돌아 왔다.

 

 실속에 밝은 친구는 느리게 살고 싶다면서 세상을 등지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버스에서 내려 30분 남짓하게 걸었다. 천천히 걸을수록 자연을 더 가깝게 새롭게 볼 수 있다. 만나는 것마다 아름다움이 있다.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내놓은 맑은소리는, 귓바퀴를 맴돌아 콧마루 너머로 느리게 스쳐간다. 그 꼬리를 놓치지 않고 따라 붙었다.

 

 친구는 찻잎을 따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마당에서는 시샘을 밀어 낸 봄이 명지바람을 깔고 누워 나른한 잠을 자고 있다. 그의 아내는 동창들과 관광버스를 타고간 뒤로 사흘이 지났다. 양달에는 애쑥들이 얼굴을 내보이며 쑥스러워한다. 새끼손가락 길이만한 것 여남은을 뜯어 쥐었다. 모종으로 옮겨 심은 할미꽃은 힘없이 고개가 숙어 있다. 그 모가지에 난 부들털 사이로 햇살이 쏟아진다.

 

 점심을 준비하는 친구의 손등은 이른 봄의 산등을 닮았다.

 작년 추석에 처남이 보내준 선물이라면서, 마른간법을 써서 냉동보관 중이던 조기 두 마리를 들어 보였다. 귀한 오사리 조기다. 이것을 양푼에 담고 쌀 씻은 뜨물을 채운 후 쑥을 띄웠다. 그 외의 양념은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 찌개가 아니다. 밥을 안치고 그 위에 놓아 쪄서 만드는 반찬이다. 밥물이 양푼으로 넘쳐 들기도 한다. 어려웠던 시절에 밥과 반찬을 한 솥에서 동시에 해내던 방식이다. 솔가지가 활활 타오르며 작은 무쇠 솥을 데워갔다. 밥이 끓으면서 뿜어져 나오는 김에는, 조기가 익어가는 냄새와 쑥 향이 배어 있었다. .

 

 밥상머리에서 둘이는 어린 시절을 더듬었다.

 메인메뉴는 남자가 만든 조깃국이다. 첫술을 입에 넣는 순간, 육이오전쟁 후에 먹었던 것을 되새김질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딱히 ‘엄마의 맛’으로는 부족함이 있지만 '얕은맛'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그와 눈을 마주치며 동의했다. 서브메뉴는 오가피 이파리로 담근 김치다. 이태를 묵혀 숙성시킨 것으로, 칠분도 쌀에 좁쌀을 섞어 지은 거칠한 밥하고 너무 잘 어울렸다. 빨리 삼키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특유의 발효 맛에 취했다. 그의 아내가 미리 만들어 놓은 다른 반찬들은 수저를 마중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디저트로 콜라비가 나왔다. 엷은 가지색 껍질까지 씹을 때, 적당한 수분과 단단함이 산뜻한 감을 느끼게 한다. 중질 정도인 사과보다는 뒤끝이 개운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음식의 좋은 맛을, 찬찬히 맛봤다, 칭찬하며 먹었다. 곰삭은 추억도 같은 맛을 내고 있었다. 오래된 친구 사이의 정에는 두터운 맛이 쌓여 있다, 이것들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김치가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다. 바람이 깊은 산속의 맛을 시원하게 실어 왔다. 

 한가하게 노닥거리면서!!!

 

광주광역시. 김 남 기. 010-8142-5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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