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담북장
나의 할머니는 3년 전, 당신의 92번째 생일상을 받으시고 4일 후에 하늘로 돌아가셨다. 요즘은 ‘9988234’라 하며 건배를 한다고 했던가?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앓다가 죽자’라는 의미로 알고 있다. 할머니께서는 99세까지는 우리 곁에 계시지 못하셨지만 92세까지는 ‘88’하게 사시다가 정말 딱 4일 누워만 계시다 돌아가셨고, 그런 할머니의 장례를 아버지 어머니는 굳이 집에서 치르셨다. 이미 장례식장 문화가 벽지에도 만연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서는 평생을 그곳에 사셨던 할머니의 장례를 선산이 훤히 뵈는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치르기를 원치 않으셨다. 삼촌과 고모들의 반대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런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다.
나를 비롯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주들은 초등학생 때까지 주어지는 의무가 있었다. 바로 여름, 겨울 방학 동안 시골에 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얼추 5~6 명의 손주들이 한 달 정도의 시간을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란다’. 여름이면 물 좋은 냇가에서 멱감기, 겨울이면 얼음지치기만으로도 하루해가 다 간다. 특히 해가 짧은 겨울엔 한참을 놀다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굴뚝에 연기가 올라가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놀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도시에서 간 우리들도 집에 돌아갈 때려니 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집에 가면 할아버지는 추운 겨울, 손주들의 잠자리를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계셨고 할머니는 그 불로 시커먼 가마솥에 밥을 짓고 계셨다. 그리고 장작이 타고 남은 아궁이의 잔불에 할머니가 보글보글 끓이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할머니가 ‘담북장’이라 부르시던 장이다. 보일러가 아닌, 뜨겁게 달구어진 구들장을 지고 자던 그때, 할머니는 콤콤한 냄새가 나는 것을 담요까지 덮어가며 고이고이 모셨고, 몇날밤을 우리와 함께 잔 그 녀석은 어느새 밥상 위에서 우리의 속을 채워주었다. 할머니는 그 담북장과, 김장김치, 동치미, 들기름과 굵은 천일염으로 조미한 김, 또다른 방안 한 구석에서 키우던 콩나물 등으로 한 달 간 한창 자라는 도시의 손주들을 거두어 먹이셨다. 밤이면 고구마를 깎아주시기도 하셨는데, 한창 강정 바람이 불 때에는 집에 있는 쌀, 검은콩, 땅콩, 검은깨, 참깨, 들깨(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단가 책정이 안 되는 최고급 간식이다) 등으로 직접 강정을 만드셨다. 아직도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중학생이었던 오빠, 나보다 더 어렸던 사촌동생들과 강정을 만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나의 할머니는 못하는 게 없는 분이셨다. 어른이 되어 내 살림을 하면서 할머니가 그때 끓여주시던 ‘담북장’이 바로 ‘청국장’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게 있어 이 청국장만큼 장소를 가리는 음식은 없는 것 같다. 시골에서 먹으면 구수하고 진한 그 맛이 입에 감기는데 도시의 아파트에서 끓여 먹으면 아무리 멋드러진 뚝배기에 끓여도 그 맛도, 그 향도 아니다. 그저 고약한 냄새의 음식일 뿐이다. 게다가 남편도 아이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할머니 목소리. “어여 담북장하고 많이 많이 먹어라.”
그저 손주들 배부르게 하는 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한 달의 목표인 양 늘 많이 먹어라 먹어라 하시던 할머니는 이제 시골집 앞 선산에서 주무시고 계신다. 살아생전 일만 하셔서 할아버지께서는 “당신은 죽으면 풀귀신 만날거여. 하도 풀을 뽑고 다녀서…”하셨다.
아직도 그때를 함께 보낸 작은 오빠는 ‘담북장=청국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할머니께서 끓여주신 담북장은 청국장 맛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어른들이, 추억서린 음식을 먹으며 ‘예전에 먹던 그 맛이 아니야’ 하는 마음이지 싶다. 지금이야 청국장을 냄새불구하고 건강에 좋다고 많이들 찾지만 나의 어린 시절 시골에서 먹던 청국장은 겨울이면 으레 먹는 할머니의 제철음식이었다. 그 음식이 나의 뼈를 채우고 살을 찌웠을 것을 생각하면 할머니는 이미 우리 곁을 떠났지만 당신의 숨결과 사랑은 아직도 내 몸에 살아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