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트, 바닷물 그리고 언밥

조회수 382634 추천수 0 2013.03.14 21:18:30

해질녁이 되어서야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백사장에 발을 디디는 순간 약간의 안도감과 더 큰 피로가 몰려왔다. 청량리에서 L과 Y와 만나, 경인선 전철을 타고, 인천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무의도에 내렸다. 지금은 인천공항 근처 부두에서 10분이면 간다고 하지만, 30년 전에는 연안부두에서 한시간 이상 걸렸던 것 같다. 섬에서 내려 또 한시간 이상을 걸어야 했다. 여행의 흥분과 긴장은 어느새 사라지고 허기와 피로에 한여름 무더위가 겹쳐, 정말 몸을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몸집이 커서 피로감도 더 컸던지 Y가 심각하게 제안했다. "오늘은 텐트치지 말고 그냥 자자. 내일 텐트치자". L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그러자"고 대답했다. 이미 과반을 넘어버린 상황에서 내가 반대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요새 나오는 폴리우레탄 매트리스가 아닌 은박지 매트리스를 대충 펴서 깔고, 텐트를 이불 삼아 덮고 배낭을 베개로 잠들었다. 중학교 동창인 우리는 그해 여름 아마 스물 하나 혹은 둘이었다. 나이만으로도 부러울 것이 없었을 때였지만 나이도 무기력을 이길 순 없었나보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이었다. 아침밥을 하기로 한 L이 사고를 쳤다. 식수를 찾으러 가기 귀찮아서 바닷물로 밥을 지은 것. 게으름의 막장이었다. 나는 코펠에서 노르스름한 부분을 걷어내고 흰쪽으로 한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다.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도 전에 짠 맛 보다는 쓰고도 역겨운 기운이 코를 찔렀다. 지금 생각하면 변질된 와인에 소금을 탄 맛이라고나할까. Y역시 몇 번 씹지도 않고 뱉어 버렸다. L은 책임감과 미안함에 "못먹을 정도는 아니다"고 말해 놓고선 세숟가락째에서 중단했다. 바닷물로 한 밥은 먹을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해는 벌써 중천에 떴는데 코펠을 씻고 식수를 길어 쌀 씻고 다시 밥을 앉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전날 점심에 라면 하나씩 먹은 이후로 아무 것도 먹은 것이 없었다.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빈 코펠을 들고 해변의 끝자락 바위에 모여 있는 낚시꾼들에게 밥을 구걸하러 갔다. "혹시 밥 남은 것 있습니까?" 체면과 수치심 따위는 극도의 배고픔 앞에서는 웃기는 소리다. 몇 번 "없다"는 소릴 들은 후에 드디어, "아이스박스에 넣어 둔 밥이 있는데 그것도 괜찮냐"는 구세주의 소리를 들었다.

 

허옇게 서리가 내린 듯 반얼음 상태의 밥을 두어 덩어리 코펠에 넣고 물을 부어 끓이기 시작했다. 그때 무슨 반찬이 있었는지 기억 나지는 않는다. 아마 반찬 없이 먹었던 것 같다. 비록 한여름에 뜨거운 김이 나는 끓인 밥이었지만 우리는 한숟가락, 한숟가락 제법 경건한 마음으로 먹었던 것 같다. 소화된 탄수화물은 우리를 행복감에 젖게 했으며, 잠시 후 우리는 기력을 회복했고, 텐트를 쳤고 계획한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그때 우리가 먹은 것은 끓인 밥만은 아니었다. 그안에는 허기와 무기력, 배고픔과 용기 그리고 언밥이 함께 녹아 있었다고나할까. 우리는 그 밥을 먹고 아주 조금이지만 어른스러워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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