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전 이맘때, 옆집 할아버지의 꼬임에 넘어간 귀 얇은 친정어머니의 성화에 남편을 처음 만났다.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성실한 청년이라서 고생은 시키지 않을 거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속는셈 치고 만나보니 성실한 거는 틀림없어 보여 같이 산 세월이 이렇게 흘렀다..
그런대로 꾸려가던 공장이 외환위기로 직격탄을 맞아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빚까지 남게 되자 살림만 하던 나는 인건비도 줄일겸 남편을 도와 일을 시작하였다. 매사에 긍정적인 남편은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며 살다보면 대박이 날 때가 있을 거라고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때마다 그 놈의 성실을 바리바리 싸서 할아버지께 되돌려 드리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런 내 마음을 눈치 채신 듯 서둘러 세상을 떠나셨다.
일에 지쳐 쉬고 싶은 마음에 기다렸던 추석연휴에 마침 보고 싶었던 영화제 수상작이 상영되고 있었다, 나도 이렇게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자긍심을 온몸으로 발산하며 영화를 보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화면에 비친 청계천의 허름한 공장이 남편이 처음 일을 배우던 곳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열악한 곳에서 일하며 미래를 꿈꾸었을 젊은 시절의 남편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울컥했다. 살면서 좋을 때 보다 미울 때가 더 많았지만 지금까지 성실해도 너∼무 성실하게 공장일에 매진하며 만족하고 있는 남편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오늘밤에는 남편이 좋아하는 당면 듬뿍 넣은 불고기전골에 술 한잔 마시면서 살얼음판 같았던 지난 세월을 서로 위로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