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선물> 진한 보말미역국 한 사발

조회수 15704 추천수 0 2012.08.08 17:27:35

  대도시에서 살아볼 만큼 살아봤고, 회사도 다닐 만큼 다녀 모든 게 지겨워질 무렵, 때마침 병이 생겨준 덕에(응?) 오랫동안 꿈에 그리던 제주로 올 2월에 훌훌 내려왔다. 시골에 거처를 정할 만큼 용감하지는 못해 제주시내에 아파트를 얻어 살고 있지만, 이웃들이 수확해서 나눠주는 채소들을 먹고, 농부님이 자기 밭 앞에서 파시는 참외와 수박의 맛을 알게 되고, 단골 정육점에서 권해 주는 맛좋은 고기를 구워 먹으며 살다 보니, 도시에서 그 맛없는 것들을 그동안 어찌 먹고 살았나 싶다. 특히나 제주의 오일장은 내게 삶의 활력을 주는 보물창고 같은 곳인데, 큰 백화점에나 가야 겨우 구경할 수 있었던 루콜라나 바질 같은 채소들이 턱하니 나와 있질 않나, 제주도 내에서 재배한 야들야들 아스파라거스, 탱글한 블루베리 들이 시시때때로 나를 유혹한다. 딱새우, 성게, 자리돔, 한치, 보말... 낯설었던 해산물 또한 다양하게 맛볼 수 있어 제주로 내려온 이래 나의 식탁은 한층 풍요롭고 재미나다.

  제주 바닷가에서는 시커먼 현무암 틈에서 뭔가를 채취하는 할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중에 하나가 ‘보말’이라는 작은 고둥 종류인데, 전복처럼 죽을 끓여먹어도 좋고, 미역국을 끓이면 진한 바다의 맛이 확 전해진다. 아, 크림 파스타에 넣어 먹어도 맛있다. 비양도에서 맛본 진한 보말죽 맛을 기억하고 있는 터라, 오일장에서 보말을 보자마자 주저 않고 사다가 삶아서 살을 발라 손질해 두었다.

  지난 달, 후배 K가 2박 3일의 제주 출장을 왔다. 문제는 이제 태어난 지 넉 달 된 아기가 있다는 것. 중요한 작가의 취재를 도와야 하는 상황이라 안 올 수가 없는데, 주말에 아기 봐줄 사람을 갑자기 구하기도 난감하고... 후배는 결국 남편을 애보개로 데리고 왔다. 하지만 남편이라고 호텔 방에서 애만 보고 싶겠나. 조심조심 취재 현장에도 함께하기는 했는데, 문제는 밥을 제대로 챙겨먹을 수가 없었다는 거다. 다른 사람이 잠시 돌봐주고 있어도, 낯선 환경에 적응 못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부부는 도저히 밥에 집중하지 못했다. 결국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과 장소란 밤중의 숙소뿐. 부부는 고픈 배를 배달음식으로 때우곤 했다. 아니, 맛있는 음식 천지인 제주까지 와서 이 무슨 고문이란 말인가.

  떠나는 날 아침까지도 부부는 ‘괜히 데리고 왔어’ 하는 후회와 수면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에, 밥을 먹으러 나가느니 잠시라도 눈을 붙이는 게 낫겠다고 했다. 나는 오일장에서 사놓은 생미역과 보말로 진하게 미역국을 끓였다. 살 오른 고등어도 한 마리 오븐에 굽고, 제주산 취나물, 친구네 텃밭에서 얻은 호박 등을 들기름에 달달 볶았다.

  졸면서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던 K는 호텔 문을 열어젖히며 “배달 왔어!” 하는 나를 보고 “엉엉, 선배... 밥이 너무 먹고 싶었어요...” 울먹였다. 부부는 나에게 잠시 아기를 맡기고 정말 맛있게 잘 먹어주었다. 아, 밥 좀 넉넉히 퍼올걸. 모유수유하는 엄마가 얼마나 많이 먹어야 하는지 미처 생각 못했던 손 작은 내가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가을에 다시 한 번 출장와야 하는 K야, 그때는 내가 밥 진짜 넉넉히 해줄게. 통통한 자리돔 굽고, 고소한 성게미역국도 끓여줄게. 아기랑 같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렴!

 

_ 작성자 신수진 dotch@hanmail.net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
공지 [이벤트] 사랑은 맛을 타고! imagefile 박미향 2011-11-18 81455
공지 [이벤트] 여러분의 밥 스토리를 기다립니다 - 밥알! 톡톡! - imagefile 박미향 2011-05-20 89248
161 <맛선물>내마음의 초계탕 olive0912 2012-08-17 15686
160 <맛선물>8월 마지막 날의 와이키키 오프닝파티 woorin88 2012-08-16 13137
159 강정평화대행진팀에게 내손으로 키운 옥수수를 hanna1004 2012-08-15 13029
158 <맛선물> - 들기름찰밥 (박형숙) file cs440112 2012-08-12 14651
157 (맛선물)-어죽 한그릇 hwy0916 2012-08-10 14515
» <맛선물> 진한 보말미역국 한 사발 my-lydia 2012-08-08 15704
155 <맛선물> 토론토 김밥 맛 file velvetin 2012-08-08 14399
154 김치밥과 벤츠 ms6445 2012-08-07 15104
153 [맛선물] 어머니 나물 잘 무쳐졌어요? slht86 2012-08-06 14308
152 엄마를 위해 죽을 끓여본 적이 있나요? borinim 2012-08-03 14062
151 [맛선물] 열두살의 그 아이에게.. file songred 2012-08-03 13304
150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음식 ;미워도 다시한번 hishij1208 2012-08-02 12829
149 독자사연 <맛 선물 >엄마와 간장게장 danae125 2012-08-02 14386
148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혹은 선물한 맛 <내가 할머니가 되면> file ignatia 2012-08-01 14407
147 독자이벤트 file gktjdgml 2012-08-01 13089
146 친정어머니께 간장게장을 선보이다 (사랑을맛을타고 응모) cwal1927 2012-07-30 16433
145 [맛선물]목살이 전복을 껴안고 삼계탕에 빠진 날 jinfeel0506 2012-07-30 12899
144 <맛선물 응모>노숙인 아저씨. 이제는 김밥 같이 먹어요. 만석꾼며느리 2012-07-28 12778
143 할머니와 만두 shu95 2012-07-27 14499
142 식어버린 우정을 위한 만찬, 나의 푸 팟 퐁 커리 대작전. 2012-07-26 14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