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히 매웠을텐데....

조회수 15627 추천수 0 2012.07.07 09:46:37

 가끔 아주 평범했던 일상이 지나고 보면 그리운 추억의 한자락으로 자리잡는 일들이 있다.  나에겐 외할아버지와 비빔국수가 그런 일중의 하나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외할아버지는 손녀를 예뻐하는 인자하신 모습으로 기억될지 모르겠으나 난 당신과 함께 살고 있는 손자를 유별나게 예뻐하고 멀리 캐나다에 사는 큰아들과 손자, 손녀를 그리워하는, 나한테는 따뜻한 말한마디 건네시지 않았던 무뚝뚝한 할아버지로 기억된다. 결혼하고도 서울에 직장이 있던 남편과 떨어져 주말부부를 하면서 아이를 맡기느라 친정에서 살고 있던 결혼 초기에 주말에 남편이 내려오면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동네 마실을 나가시고, 아빠는 텃받일을 핑계로 밖으로 나가시곤 했다. 평소 말이 없는 사위가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오붓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시골에 사시는 외할아버지께서 갑자기 오셨던 그날도 엄마, 아빠는 뭔가 핑계를 대시면서 집을 나가셨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서 식사문제도 있고 좀 당황스러워서 얼른 엄마를 찾으러 동네를 돌아다녔지만 평소에 계시던 곳에 안계셨고 그때만 해도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도대체 엄마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결혼했지만 친정에 살면서 엄마한테 의지하고 있던터라 갑자기 오신 외할아버지의 점심한끼를 어떻게 대접해드려야할지 정말 난감했다. 지금이라면 소문난 좋은 맛집을 모시고 가기라도 하겠지만 차도 없고 외식문화가 그닥 익숙하던 때도 아니어서 뭔가 준비를 하긴 해야하는데 하면서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그냥 있는 밥에 반찬만 드리면 어쩐지 너무 무성의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엄마 찾기를 포기한 나는 씽크대 서랍장에 있는 국수를 꺼내 삶고 냉장고를 뒤져서 찾아낸 이런저런 야채를 다듬어 음식솜씨가 좋아 장맛도 좋은 엄마표 고추장에 설탕, 깨소금, 참기름 등을 넣어 맛있는 양념장을 만든다음 조금 큰 그릇에 한껏 멋을 내어 삶은 국수, 야채, 고추장양념을 얹어 비빔국수를 내어 드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팔순이 다되신 할아버지 입맛에 좀 매우셨을텐데 아무 말씀 없이 그릇 가득한 국수를 다 드셨다. 식사를 하시고 엄마를 기다리시던 할아버지는 시내에 볼일이 있으시다며 가셨고 그렇게 가신지 3일만에 돌아가셨다. 아마 당신도 뭔가 느낌이 있으셨는지 '딸내미'가 보고 싶으셔서 그렇게 갑자기 오시지 않았나 싶다. 정신없이 장례를 치루신 외숙모께서 말씀하시기를 며칠전에 갑자기 나갔다 들어오셔서는 전주 갔다 아주 맛있는 비빔국수를 드시고 오셨다면서 참 맛있더라고 몇번을 말씀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애썼다는 말씀도 없이 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 싹 사라졌다. 어느새 20년이 지나버린 일이고, 할아버지 얼굴도 가물가물 생각안나지만 비빔국수를 먹을 때마다 한번씩 떠오르는 아련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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