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외할머니가 4분입니다.
엄마의 언니들을 낳으신 분, 엄마와 이모를 낳으신 분과 키우신 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막내 외삼촌을 낳으신 분. 어릴때는 무척 창피했고, 계모밑에서 이복언니들과 자란 4살짜리 우리 엄마가 너무 가여워서 내가 우리엄마의 보호자가 되어야지 생각하며 컸습니다. 지금도 외가쪽 가계가 자랑스럽진 않습니다.
열흘 전 우리집에서 일본손님 4분을 대접했습니다. 엄마의 엄마가 일본에서 낳은 딸들이었습니다. 집으로 초대를 잘 하지 않는 일본인들에게 "당신은 내 엄마 손님이라 귀한 대접 받는 것이다."라는 메세지를 주고 싶으셨나 봅니다.
김치 3가지, 나물 5가지, 생선 3가지, 전 5가지, 갈비찜, 잡채, 샐러드... 맛은 몰라도 보기에는 정말 상다리가 휘어졌습니다. 점심 물리고 과일내고, 바나나 쉐이크 만들어 드리고, 커피 내려드리고.. 한국말 잘 못하는 분들과 일본말 좀 하는 분들이 5년만에 만나 수다떠는 모습이 참 좋아 보였습니다. 5년 전 만났을 때 한국말을 너무 못해 한국드라마 보며 좀 익혀 듣기는 잘한다고 자랑하는걸 보면 한류열풍이 대단한가 봅니다. 아줌마들의 수다에는 국경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동안 들었던 얘기 95%에 처음듣는 얘기는 5%였는데도 양국의 만담가를 모셔놓은 듯 울다 웃다 참 재미있었죠. 계획대로라면 3시쯤 호텔에 체크인 시켜드리고 끝났겠지만 깨기 힘든 그 분위기에 "오후 일정 없으시면 저녁 드시고 체크인 하시겠어요?"라고 뱉고 말았습니다. 여섯분 모두 절대 찬성!! 결국 시어머니께 보내려고 냉장고에 얼려뒀던 곰국을 녹였습니다. 저녁은 송송썬 대파와 깻잎장아찌, 배추김치, 열무물김치, 석박지로 간단히 차려냈습니다.
거의 12시간을 시중들면서 참 이상하게도 행복했습니다. 어쩌면 약간의 복수심으로 만든 자리였는데... 음식을 함께 나누며 어떻게 만들었냐는 질문에 요리법도 가르쳐 드리고 칭찬도 들으며 제 귀에 들린 아버지 다른 자매들의 삶에 대한 이해와 용서가 두끼 나눌 시간을 부대끼며 늙어가는 저를 무장해제 시켰나봅니다. 마중나갈땐 '게이꼬상', 배웅할땐 '이모' 했으니까요. 혹 하룻밤 잤다면 헤어질때 울었겠네 하며 피식 웃어봅니다.
그 동안 엄마가 "네 할머니 미워하지마. 불쌍한 분이야." 하면 "무슨 할머니? 엄마의 엄마지. 미워한적 없어. 관심없으니까."라며 자기 자식버린 어미가 무슨 엄마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95세이신 그분께 당신 첫자식의 맏이로서 한끼 대접하고 싶습니다. 일본손님들이 입에 잘 맞다고 한 그 식단에 신선로, 구절판 더 얹어서 "당신은 귀한 분입니다. 우리엄마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서요. '그 시대 상황. 이해는 하지만 용서하지 않아요.'따위의 건방진 말은 꾹 삼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