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선물>
마지막 생신날의 잡채
어릴 때 맛보았던 음식 중 잡채에 대한 기억은 화려하다. 잔칫날 대표적인 음식이자 항상 나의 기대에 부응하는 감칠 맛이었다. 그래서 음식점에 가서도 잘 차려진 다른 음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날의 잡채에 대한 추억으로 인해 항상 잡채를 남김없이 먹어치우곤 했다. 음식이란 허기를 달래고 맛을 취하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추억을 먹는 행위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음식 중의 하나가 바로 잡채인 것 같다.
결혼 후 가족들의 생일상을 차리면서도 잡채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 메뉴였다. 특히 어른들의 생신상에는 장수의 기원까지 담아서 꼭 넣고는 했다. 손과 정성이 많이 가야 하는 품목이긴 하지만 그 하나만으로도 잔칫상을 빛내주는 효과가 있어서 망설임 끝에 선택하는 음식이기도 했다.
둘째아이를 임신하여 만삭이 다 되어가는 즈음에 시아버지 생신을 맞이했다. 시동생이 아직 결혼 전이라서 며느리라고는 달랑 나 혼자였다.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어른 생신은 주변 친척까지 다 초대하는 큰 행사라서 어른 생신이 다 되어 가면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만삭이 되어가는 며느리 상태를 존중해서 그 해 아버님 생신은 시골이 아닌 우리 집으로 정했다. 시골에서 하는 것 보다는 짐을 덜었지만 시집 식구들을 초청하여 우리 집에서 생신을 치러야 한다는 부담 또한 그다지 작은 것이 아니었다. 직장 다니는 처지로 살아왔던지라 살림이나 음식 솜씨 또한 별로 자신이 없었다.
남편 옆구리를 찔러서 형제들이 모두 모이는 저녁 식사는 외식으로 해결하고 다음 날 아침상을 생신상으로 차리고자 계획을 짰다. 임신 중 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약간의 스트레스만 있어도 몸 상태에 표시가 났던지라 그날도 아침상을 차리기 전 새벽부터 배가 아파왔다. 그래도 참고 시누이들과 함께 생신상을 차렸다. 재료를 준비해 두었던 잡채도 버무렸다. 아침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간 결과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다. 그렇게 조마조마하게 아버님 생신을 치렀다. 근데 그것이 내가 차린 마지막 아버님 생신상이 되었다. 그 해에 아버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임신 중독의 상태에서 생각보다 일찍 둘째 아이를 출산한 후, 내 몸은 회복이 잘 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아이의 몸 상태도 좋지 않았는지 밤마다 아이는 울었다. 할 수 없이 갓난아이를 시골 시댁에 맡겨놓고 몸조리를 하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몸이 불편하신 아버님을 대신하여 혼자 동분서주하며 농사일을 해오셨다. 자연히 갓난아이는 아버님 차지가 되었다. 그물침대처럼 매단 요람에서 아이는 낮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밤마다 울던 아이는 신통하게도 시골로 간 며칠 후부터 울음을 그쳤다. 어머님이 농사일을 나가신 낮에 아이가 칭얼대면 아버님은 길게 늘여 매어놓은 끈을 흔드시고, 그렇게 하면 아이는 칭얼거림을 이내 그쳤다고 한다. 천식이 있으신 노인네의 기침이 해로울까봐 일부러 끈을 길게 해놓으셨던 모양이다. 방문 근처 요람 속의 아이와 길게 늘여놓은 끈 저쪽의 할아버지, 요람에 매단 끈을 통해 어떤 교감들이 오고갔을까? 조용한 시골집, 모두가 논과 밭에 나간 한낮의 고요 속에서 ‘왜 아무도 없지?’ ‘할애비 여기 있다.’ 요람의 흔들림은 그런 신호의 역할을 했겠지.
유명한 94년도의 더위였다. 백일이 지난 후 아이를 시골에서 우리 집으로 데려오고, 그 더위가 끝나가던 즈음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요람을 흔들어주던 할아버지의 손길이 아버님이 마지막으로 하셨던 손주 뒷바라지셨던 것이다.
“대구 생신 해잡숫고 와선 늘 ‘가가 해준 잡채, 맛있더라.’고 카시더만, 그만 다음 생신상도 못 받고 세상 베릿네.” 장례식을 치르면서 어머니는 몇 번이나 그 말씀을 하셨다. 음식솜씨도 별로 없던 며느리가 해 준 귀한(?) 잡채라서 더욱 맛나게 잡수신 게지. 결혼 후 4년 동안 시건방지고 잘난 척하는 며느리에게 한 번도 싫은 소리 안 하시고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셨던 아버님. 아버님에 대한 추억은 그리 많지 않지만 돌아가시던 해, 그렇게 맛나게 잡수셨다는 며느리표 잡채(?)와 아이의 요람을 흔들었던 풍경은 자주 자주 일상에서 떠오르곤 한다.
‘그렇게 봐주셨던 둘째아이는 잘 자라서 벌써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요람을 흔들어주시던 할아버지는 기억 못하지만 할머니의 고된 어깨는 잘 주물러 드리는 착한 손주가 되었답니다. 아버님~’
박영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