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소풍날이면 엄마는 시골집 부엌 바닥에 자리를 깔고 김밥을 싸셨다. 두세 살 터울로 4형제가 나란히 학교를 다녔으니 도시락 4개는 기본이고 거기다 어김없이 선생님 도시락까지 함께 싸셨으니 도대체 그 아침이 얼마나 바빴을까? 맛살이나 햄, 소고기 등은 구경도 못하던 시절이었건만 엄마의 김밥은 어느 집 김밥보다 맛있고 환했다. 듬뿍 썰어 넣은 당근 채가 살짝 데친 제철의 초록나물 사이에서 석류꽃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결혼을 하여 아이를 키우며 김밥을 쌀 일이 잦아졌고, 값나가는 음식이 아닌데다 나남 없이 좋아하니 자주 김밥을 싸게 되었다. 가족모임이나 나들이에는 물론, 이웃집 어른들께도 자주 싸 날랐고, 큰아이 고3때는 야식으로도 자주 넣어주곤 했다. 운이 좋아 3년간 김밥을 먹은 아이도 있었다. 졸업 무렵엔 “엄마 잘 계시냐?”가 선생님들의 안부이기도 했다. 그 소리를 들으면 또 김밥을 싸곤 했다.
싱싱하고 튼튼한 상치만 보면 나는 김밥을 싸고 싶어진다. 얇게 깐 밥 위에 식감좋게 생긴 도톰한 상치와 깻잎을 두어 장씩 깔고 그 위에 당근, 오이, 단무지, 달걀, 우엉, 어묵볶음을 듬뿍 넣어서 말면 된다. 봄철엔 보드라운 생 미나리나 당귀, 취나물 등을 넣으면 어른들 대접에도 좋다. 어묵볶음엔 반드시 땡초를 가득 넣어 눈물, 콧물 범벅이 되기 일쑤니 내 김밥은 으레 크고, 맵다. 김밥 속에 상치가 오글대고 온갖 야채가 서걱거려 김밥인지 쌈밥인지 구분이 안된다며 툴툴대다가도 금방 추종자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 병환으로 한동안 김밥을 쌀 수 없었다. 김밥과 함께 고딩을 마친 큰애가 대학 1년을 마쳐갈 무렵이었다. 하나, 둘 객지 생활을 마무리하고 돌아와 그리던 집밥을 먹으면서도 언제쯤 엄마표 김밥을 먹을 수 있냐고 야단들이었다. 엄마김밥이 그리워서 군대를 못가겠다는 놈에다 나중에 임신해서 엄마김밥이 그리우면 어떡하냐는 둥 별의별 말들이 들려왔건만 아버지는 여전히 병석에 계셨고 나는 그해 겨울 한 번도 김밥을 쌀 수 없었다.
서럽고 안타깝게 지난 겨울 아버지를 떠나보냈고 여전히 김밥 같은 건 엄두도 못내고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말이 방학이지 계절학기나 알바로 힘들었던 아이들이 개학하여 뿔뿔이 흩어지기 전, 언제 하루 날을 받아 정성스레 김밥을 말아야겠다. 주임이, 수빈이, 배효, 주은이, 정이, 진솔이... ‘김밥파티’라고 한 줄만 날리면 달려올 애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상치랑 땡초를 한 소쿠리 준비하고 어묵엔 탱초를 듬뿍, 우엉도 맛나게 졸여야지.
공연히 매운 땡초 타령을 해대면서 눈물을 훔치겠지. 공중에서 미소만을 날릴지언정 그 상에 먼저 가신 엄마와 아버지를 초대하지 않은 순 없지 않은가. 이 김밥이 어디서 왔는고 생각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