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선물>강남 피자

조회수 14467 추천수 0 2013.03.15 15:22:38

지금처럼 골목마다 피자집이 없던 90년대 초, 피자는 빈대떡처럼 가깝지 않았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학시절 친구 집에 갔을 때, 집에서 피자를 만들어 먹는 그 집의 일상은 강북에서 강을 건너온 나로서는 놀라움 자체였다. ‘귀한 피자를 집에서 이렇게 손쉽게 해 먹을 수 있다니.’

 

맛도 맛이지만 멀게만 느껴졌던 피자를 의외로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더 흥분되었을 것이다. 꼼꼼하게 방법을 배워왔다. 그 뒤로 늘 한식만을 고집하던 우리 집은 자주 피자를 굽기 시작했다. 소스는 토마토 케찹, 마늘, 양파가 전부고. 피자도우는 밀가루에 계란과 우유로 끝낸다. 토핑이랄 것도 없다. 치즈만 풍성하게 얹었다. 특별할 것도 없고, 화려할 것도 없는 재료다. 오븐이 없었기에 프라이 팬 뚜껑을 닫아 아래서는 굽고 위에서 익히는 식이다. 하지만 그 맛은 온 식구를 사로잡았다.

 

강남에서 배워온 피자이기에,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피자이기에, 다섯 남매는 자주 피자를 먹었다. 친구가 오거나, 마음편한 손님이 방문하게 되면, 으레 피자를 대접했다. 내가 군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도, 어머니는 그 피자를 만들어 주셨다.

 

20년이 지난 지금, 더 이상 집에서 피자를 만들지 않는다. 5남매가 모두 결혼하고, 그녀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세월만큼 세상은 변했다. 이제 우리는 아무도 그 피자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무도 누군가를 위해 피자를 굽지도 않는다.

 

문득, 주말 내내 엄마를 들볶는 큰 녀석과 그런 형과 온 종일 티격태격 하는 작은 녀석, 그리고 먹성이 참 좋은 막내를 보면서 그 피자가 떠올랐다. 강남에서 배워왔던 피자.

 

또 다른 20년이 지난 후, 아이들이 추억할 수 있는 피자를 만들어야겠다.

아이들은 기억할 것이다. 강남 피자가 아니라 아빠가 만들어준 피자로.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sort
공지 [이벤트] 사랑은 맛을 타고! imagefile 박미향 2011-11-18 82271
공지 [이벤트] 여러분의 밥 스토리를 기다립니다 - 밥알! 톡톡! - imagefile 박미향 2011-05-20 90151
81 물에 만 밥과 왕자님 hwangsy74 2011-09-09 15067
80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과 누룽지<사랑은 맛을 타고 응모> erlove0314 2012-05-10 15067
79 [밥알톡톡]한밤의 제삿밥 file jikimi75 2011-08-24 15072
78 밥도 죽도 아닌......... wndgmd503 2012-07-08 15074
77 <사랑은 맛을 타고>터지기 일보 직전! qkrdmswkek 2012-06-18 15099
76 <사랑은 맛을 타고>환상의 섬 발리에서의 컵라면누룽지탕 hongsil65 2012-02-02 15108
75 낭화를 아시나요 ? jhk9324 2012-09-29 15114
74 [맛선물] 엄마의 떡볶이 moon5799 2012-08-24 15163
73 여름철 입맛없으신 분들에게 선물해드리고 싶은 맛~ mooi03 2012-07-23 15166
72 여자 할머니의 밥상 banana0326 2012-02-03 15169
71 맛선물 wang0827 2012-09-28 15174
70 <사랑은 맛을 타고> 할머니의 비빔밥 lovelysoo 2012-02-13 15227
69 김치밥과 벤츠 ms6445 2012-08-07 15292
68 처음이자 마지막인 남편의 요리 ^^ pgydirs 2012-03-15 15350
67 할머니의 담북장 knue93 2013-01-29 15351
66 <맛선물> 우린 역도부 삼형제! dmsgud100 2012-10-12 15563
65 [맛선물] 제발 받아줘 namij 2012-10-29 15673
64 [밥알톡톡 공모] Fried Rice? 볶음밥? jikimi75 2011-05-31 15719
63 꿈에서라도 설렁탕을...... jean7208 2012-07-20 15726
62 팥 칼국수의 추억 qkrgodtla 2012-06-08 15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