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맛을 타고> 할머니의 비빔밥

조회수 10381 추천수 0 2012.02.13 10:58:49

한 생명이 태어나면 한 생명이 저문다고 누군가 그랬다. 내가 첫째를 낳고 삼칠일이 지나기 전에 할머니께서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께서는 항상 비빔밥만 드셨다. 내가 잘못 기억하나 싶어 엄마에게 물어봤더니 엄마도 맞단다. 할머니께서 유난히 비빔밥을 좋아하셨어.

그 비빔밥은 식당에서 파는 돌솥비빔밥이나 산채비빔밥 과는 다른 것이었다. 미친 존재감을 뽐내는 고추장이 들어가지도 않았고, 계란 후라이가 노란자 흰자의 동심원을 그리며 밥 한 가운데에 예쁘게 앉아 있지도 않았다. 맏며느리인 우리 엄마가 전날 와서 기름 튀겨가며 하루 종일 굽는 고구마튀김, 생선전, 소고기- 맛살- 쪽파의 삼색 꼬치, 오징어 튀김 등등이 상에 가득해도 항상 비빔밥만 드셨다. 그 당시 어느 집에나 있던 스텐레스 대접에 밥을 얹으시는 게 제일 먼저다. 그리고는 콩나물, 도라지, 고사리, 무나물, 아니 뭐든 좋다. 상 위에 올라와 있는 나물들을 턱 턱 넣고 척척 비벼서 나물들이 수양버들처럼 숟가락에서 흘러 나온 채로 입에 넣으셨다.

할머니께서는 왜 그렇게 비빔밥을 좋아하셨을까.

그렇게 식사를 하시고 상을 치울 즈음이 되면 할머니께서는 우리들이 다 있는 곳에서 옷을 갈아입으셨다. 마른 몸에 굽어질 대로 굽어진 허리, 처진 가슴으로 뒤돌아서 몸빼바지로 갈아입으시던 할머니. 그 모습을 떠올리면 서글퍼진다. 할머니께서는 왜 그러셨을까.

하지만 이제는 할머니께서 그렇게 비빔밥을 좋아하시던 것도, 가족들 앞에서 옷을 갈아 입으시던 것도 이해가 된다. 할머니 입장에서 보면 우리 앞에서 옷 갈아입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거기 앉아 있는 모두가 할머니에게서 나온 가지들인데 말이다. 아이들에게 젖도 물리고 매일 같이 목욕도 해 보니 아이들 앞에서 옷 갈아입는 게 나에게도 자연스럽다.

할머니께서 항상 비빔밥을 선택하셨던 것도 초딩 입맛을 벗어나는 나이가 되고 나니 이제 알 것 같다. 비빔밥은 객관적으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는 것을. 비빔밥은 할머니의 이기적인 선택이었던 것이다.

사실, 나물만 맛있으면 비빔밥은 맛있을 수 밖에 없다. 나물에 이미 간이 배어 있으니 고추장이 필요 없다. 계란 후라이를 얹지 않아도 색색의 나물만으로 예쁘고 맛있다. 나물 삶으면서 나온 국물만으로 비비기 편하고 이미 참기름 혹은 들기름으로 무쳐져 있기에 참기름 두르지 않아도 된다. 할머니께서 맛있는 반찬을 우리에게 양보하셨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다. 우리 시골 나물로 가득한 비빔밥은 명절상의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sort
공지 [이벤트] 사랑은 맛을 타고! imagefile 박미향 2011-11-18 54047
공지 [이벤트] 여러분의 밥 스토리를 기다립니다 - 밥알! 톡톡! - imagefile 박미향 2011-05-20 59639
221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음식 ;미워도 다시한번 hishij1208 2012-08-02 9839
220 눈물의 밥상 john1013 2012-01-27 9843
219 사랑은 맛을 타고-강아지도 외면한 첫 요리의 추억 xhddlf8794 2012-01-17 9852
218 할아버지 레시피 jejubaram 2011-11-20 9855
217 생신상을 차려드리고싶은 딸 chow88 2012-07-20 9867
216 강정평화대행진팀에게 내손으로 키운 옥수수를 hanna1004 2012-08-15 9875
215 <맛선물>특별한 서른셋 생일 케이크 ddorimom2003 2013-01-14 9884
214 할머니. 맛있게 잡수셔요 bujam1025 2012-07-23 9902
213 92,하이킹,저녁밥 namsurk 2012-05-15 9911
212 [맛선물] 아빠 그때는 몰랐어 미안해 file lovehse 2013-01-13 9933
211 참치 청국장의 반전 image jjs6862 2012-01-13 9938
210 <맛선물> 마지막 요리 zerooh 2013-02-07 9945
209 허니문 푸어의 그맛 alduswjs 2012-01-27 9970
208 산딸기, 여름방학 그리고 카르페 디엠- 내 생에 잊을 수 없는 특별한 맛 clear123 2012-06-19 9971
207 제육볶음도 못 먹어 본 여자 yanxi798 2012-07-05 9971
206 '맛 선물' <흉내낼 수 없는 그맛> kkouns90 2012-12-28 9973
205 <맛선물> 마지막 생신날의 잡채 ssuk0207 2012-07-23 9982
204 <어머니께 드린 맛선물> minski 2012-07-19 9991
203 잊을 수 없는, 그 떡국의 비릿함 farwest 2012-05-21 10030
202 <맛선물> 어머니표 사랑의 굴떡국 ambasa11 2013-01-05 10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