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그릇에 비빔밥
때는 1980년, 고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그 때 나는 본가에서 40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고향 친구들이 갑작스레 자취방으로 찾아왔다. 고맙고 반가운 마음에 맨발로 친구들을 맞았지만 마음에는 이내 걱정이 피어올랐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던 열여덟 시절, 게다가 점심시간이 지난 때라 친구들의 얼굴에 배고픔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자취방에 밥솥이라고 있는 건 양은냄비 하나뿐이었다. 거기에 밥을 안친다 해도 나를 포함해 7명의 남자가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터였다.
하지만 멀리서 온 친구들을 주린 배로 둘 수는 없는 노릇. “주인집에 가서 빌려올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인집으로 갔지만 사람이 없었다. 부엌문 너머로 솥이 보이는데도 가져올 수 없는 심정에 초조함만 더해졌다. 그렇게 몇 분 쯤 흘렀을까, 마당에 깨끗한 솥이 하나 보였다. 뚜껑은 없지만 친구들과 내가 배부르게 먹기엔 충분한 크기였다.
나는 친구들의 환호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자취방으로 돌아가 연탄불을 피우고 솥에 밥을 안쳤다. 우리는 있던 반찬을 다 꺼내 비빔밥을 만들어 먹고, 그도 모자라 누룽지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허기에 지쳤던 얼굴들은 포만감의 환희에 젖어 반짝반짝 빛까지 내는 듯 했다.
그렇게 배불리 먹은 후, 괜히 흐뭇한 마음으로 솥을 씻던 나는 수돗가에서 주인집 아줌마와 조우했다. 그런데 아줌마가 손사래를 치며 다가오는 게 아닌가. “학생, 그거 안 씻어도 돼. 그냥 둬.” 나는 고마운 마음에 그냥 웃어 보였는데, 그때 아줌마가 결정타를 던졌다. “그거 개밥그릇이야. 안 씻어도 된다니까~”
그 여름날 충격으로 남았던 ‘개밥그릇 사건’은 지금까지도 우리 사이의 이야깃거리이다. 지금은 내 딸들이 그때의 나보다 나이가 많아져 생애 첫 자취를 앞두고 있다. 따뜻한 오후 햇살 속에서 개밥그릇을 사이에 두고 우정을 나누던 그날,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