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그 떡국의 비릿함

조회수 10093 추천수 0 2012.05.21 16:18:59

맛이 우러나고 남은 멸치가 퉁퉁 불어서 그릇 바닥에서 잠수를 타고 있고, 희번덕거리는 멸치 비늘이 유영을 하는 그 떡국은, 유별나게 입이 짧았던 젊은 시절의 나를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음식이었다.

차마 수저를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떠먹는 시늉을 했지만 떡국은 아무리 해도 줄어들지 않았고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아버지께서는 겸연쩍은 듯이 한 말씀하셨다.

“내가 생전 떡국을 끓여 봤어야지. 국물에 뭐든 넣어야 할 것 같은데 마침 멸치가 있기에 넣어 봤다.”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친척 할머니께서 집에 머무르시면서 이런저런 부엌일을 맡아주셨는데, 어쩐 일인지 그 날은 할머니도 시골로 내려가신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다닌다고 외지에 나가 있다가 연휴를 맞아 집으로 내려온다는 딸내미를 위해 밥상을 차려주어야겠다고 맘먹은 아버지께는 아마 떡국이 가장 만만했던가 보다. 구정 때 먹고 남은 떡은 채 불지 않아 딱딱했고, 제 때에 멸치를 건져내지 않아 비릿한 냄새가 떡 맛을 삼켜버린, 내 인생의 잊지 못할 그 음식은 아버지께서 만드신 첫 음식이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늘 엄하시고, 때론 무섭기까지 하여 우리 다섯 남매에게 있어 아버지는 어려운 분이셨다. 자질구레한 용돈이나 학교 이야기도 어머니께 이야기하기 마련이었고, 어머니와 다툰 후 단식이라는 카드로 어머니 속을 태울 때나, 입에 맞는 반찬 없다고 밥상머리에서 투정을 부리다가도, “은주야!” 부르시는 아버지의 한 말씀에 나는 순한 양으로 급변하여 밥 때를 위해 하루를 기다린 사람처럼 수저를 들기 일쑤였다.

그렇게 무섭기만 하시던 아버지는 혼자되신 후, 오랜 세월 쓰고 계시던 가면을 벗어 던진 사람처럼 조금씩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만이 생활의 전부였던 아버지께서, 새로 장만한 소니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가요에 시간을 내주시기도 하고, 그림과 서화에 취미를 들이시고 온 집 안을 먹향으로 채우시기도 했다. 외로우셨을 게다. 오직, 가부장적인 권위와 위엄만으로 버텨 오신 가정생활, 속내를 드러내는 일을 가벼운 언행이라 여기셨을 생각에 수십 년 갇혀 계시던 아버지……. 여태껏 지탱해 오던 아버지와 남편의 모습 속에 눌려 있었을 속 깊은 외로움, 나눌 이 없어 더욱 절절했을 그 황량함과 쓸쓸함…….

그런 아버지는, 비릿한 떡국 한 그릇으로 어느 날 나에게 다가오셨다. 제대로 퍼지지 않은 떡 같은 어색함으로, 무엇을 넣어야 할지 몰라 맹숭한 국물 같은 담담함으로. 하지만 넘치는 부성을 담아내기라도 한 듯이 쌀쌀한 초봄을 녹였던 뜨거운 국물……

그 떡국을 한 번만이라도 다시 먹을 수 있다면 싱그러운 초여름의 녹음이 이리 서글프지 않을지 모른다. 그 비릿함을 한 번만이라도 다시 맡을 수만 있다면 피었다 지는 꽃들이 이토록 애달프지 않을지 모른다.

 

(정은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sort
공지 [이벤트] 사랑은 맛을 타고! imagefile 박미향 2011-11-18 54850
공지 [이벤트] 여러분의 밥 스토리를 기다립니다 - 밥알! 톡톡! - imagefile 박미향 2011-05-20 60389
221 그건.... 사랑이었다 hheysoo 2012-02-28 9919
220 생신상을 차려드리고싶은 딸 chow88 2012-07-20 9925
219 할아버지 레시피 jejubaram 2011-11-20 9934
218 사랑은 맛을 타고<꽃게다리살 비빕밥> ykkchoi 2011-11-03 9936
217 강정평화대행진팀에게 내손으로 키운 옥수수를 hanna1004 2012-08-15 9937
216 <맛선물>특별한 서른셋 생일 케이크 ddorimom2003 2013-01-14 9937
215 눈물의 밥상 john1013 2012-01-27 9957
214 할머니. 맛있게 잡수셔요 bujam1025 2012-07-23 9967
213 92,하이킹,저녁밥 namsurk 2012-05-15 9970
212 [맛선물] 아빠 그때는 몰랐어 미안해 file lovehse 2013-01-13 9973
211 <맛선물> 마지막 요리 zerooh 2013-02-07 9981
210 참치 청국장의 반전 image jjs6862 2012-01-13 10011
209 산딸기, 여름방학 그리고 카르페 디엠- 내 생에 잊을 수 없는 특별한 맛 clear123 2012-06-19 10027
208 제육볶음도 못 먹어 본 여자 yanxi798 2012-07-05 10036
207 '맛 선물' <흉내낼 수 없는 그맛> kkouns90 2012-12-28 10042
206 <맛선물> 마지막 생신날의 잡채 ssuk0207 2012-07-23 10049
205 <어머니께 드린 맛선물> minski 2012-07-19 10057
204 허니문 푸어의 그맛 alduswjs 2012-01-27 10081
» 잊을 수 없는, 그 떡국의 비릿함 farwest 2012-05-21 10093
202 <맛선물> 어머니표 사랑의 굴떡국 ambasa11 2013-01-05 100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