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선물] 제발 받아줘

조회수 15607 추천수 0 2012.10.29 07:41:38

유럽 귀족들은 아침마다 아이들에게 캐비어를 한 숟가락씩 먹인다지요. 재수없는 이야기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구별할줄 아는 미각도 재능이라면서요. 저는 어머니가 장사하러 나간뒤 혼자 식은 밥을 찾아먹고 자랐습니다. 저와는 달리 제 남편은 매끼니 칠첩반상을 받고 자랐습니다. 제가 만화방에서 쥐포 구워 먹을 동안 남편은 그 시절에 파인애플을 먹었답니다. 제 소울푸드는 길거리 찹쌀 순대인데 남편은 가자미 식해랍니다. 같이 살기는 힘들지만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씨도둑은 못한다’더니 우리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 젖을 물 때부터 장차 입맛이 얼마나 까다로울지 예고편을 찍었습니다. 이유식 먹을 때부터 전복이라든가, 지방을 제거한 소고기 등심이라든가 이런 걸로 죽을 끓이는 것은 기본이고, 때로는 미역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과 무를 잘게 다진 미역국에 다시 홍합을 넣는 아방가르드한 실험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제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먹이다보면 우리 아이한테는 미각은 물론이고 좋은 음식에 대한 추억이 많이 생기지 않을까 했습니다.

엄마는 장사를 다녔지만 지금 저는 회사를 다닙니다. 매일 아침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합니다. 어린이집에서 무엇을 먹이는지는 정확히 몰라도 아침부터 낙지죽을 끓여준다, 새우볶음밥을 해준다 유난을 떱니다. 주말에 주로 아이에게 선물하고 싶은 맛을 담아 밥상 공세를 폅니다. 조화로운 맛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하얀 생선은 담백하게 구워서 하얀 쌀밥에 얹어먹고 비린 생선은 데리야끼 소스를 뿌리고 살짝 구운 가지나 토마토, 단호박에 곁들여서 먹는다든가, 얇게 펴서 연어, 계란, 시금치로 삼색 소보루를 만들어 얹은 볶음밥이라던가.

그런데 얼마 전 우리 아이를 데리고 공원에 다녀왔습니다. 배는 고픈데 근처에 작은 매점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둘이서 컵라면을 먹었습니다. 아이는 한젓가락만 먹이고 일단 제 배부터 채울 셈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컵라면 먹고 자랐으니까요. 한 젓가락을 먹어본 아이가 거의 울먹였습니다. “엄마,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게 다 있나.” 이런, 그날부터 우리 아이의 소울 푸드는 컵라면이 되어버렸습니다. 미각이고 조화고 다 소용없고 조미료가 갑입니까. 오늘도 된장찌개에 고기를 넣을까 꽃게를 넣을까 무장아찌 국물로 간을 할까 고심하다 말고 엄마가 선물하고 싶은 맛과 아이가 선물받고 싶은 맛 사이의 거리에 대해 생각합니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sort
공지 [이벤트] 사랑은 맛을 타고! imagefile 박미향 2011-11-18 81657
공지 [이벤트] 여러분의 밥 스토리를 기다립니다 - 밥알! 톡톡! - imagefile 박미향 2011-05-20 89483
161 <사랑은 맛을 타고> 건강한 밥상으로 거듭나기! sozu20 2012-06-14 14108
160 돼지국수의 추억 deli84 2013-03-10 14112
159 <사랑은 맛을타고>밥은 어떻게 하지?^^ hamyr23 2012-06-09 14113
158 그녀의 쌀국수 ssogon2 2012-01-03 14170
157 사랑은 맛을 타고 - <설탕가루 묻힌 달달한 도너츠> [1] bongtae1025 2011-11-01 14191
156 (사랑은 맛을타고 응모작) 미스테리한 검정색 스푸의 정체는? singasong33 2012-05-24 14206
155 겨울철 고추가루 무국 이작가 2013-02-17 14221
154 한겨울 먹는 못생겼지만 맛있는 추억의 맛. songi535 2013-03-17 14222
153 <어머니께 드린 맛선물> minski 2012-07-19 14229
152 <맛선물>처음 맛 보인 요리들 jpoem 2012-12-11 14233
151 새내기의 순두부찌개 andhkh 2013-02-08 14234
150 <맛 선물> 남편의 생선 file khhy66 2013-03-19 14240
149 <맛선물>멀어져버린 그들에게 언젠가 다시 생태찌개를 끓여줄 날이 오기를 cjhoon73 2012-12-13 14254
148 <맛선물> 마릴라 이모님의 토스트와 코코아 congimo 2013-02-28 14270
147 할머님의 마지막 진지상. imagefile ksyo6465 2011-11-14 14278
146 <맛선물> 양장피의 은밀한(?) 추억 jeeho21 2013-03-20 14315
145 [맛선물] 어머니 나물 잘 무쳐졌어요? slht86 2012-08-06 14338
144 생김치 한다라이 janghsuck1 2013-01-10 14338
143 [이벤트] 소다북어국 sowon9781 2013-01-12 14350
142 한 겨울의 먹었던 꿩 요리 qkrgodtla 2012-05-11 14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