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먼저~아우 먼저~ 코미디언 둘이 라면그릇을 서로 양보하며, 밀고 당기던 라면 광고가 인기를 끌던 70년대 초, 시골에서 살다 도시로 갓 나온 우리 형제에게 라면은 귀한 음식이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꼬부랑 국수 맛이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라면이 밥상에 오르는 날이면, 광고와는 달리 젓가락 전투를 벌이기 일쑤였다. 그런데 할머니나 어머니는 양을 늘리려고 국수나 콩나물을 넣어 삶아 정작 라면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음식 욕심이 많던 나는 라면이 너무 적다, 형 것이 더 많다며 투정을 부렸고, 얌전했던 형이나 아우도 이때만은 양보가 없었다. 하도 자주 토닥거리니 할머니는 아예 라면을 푹푹 삶아 면발이 국수처럼 펴지도록 했고, 안 그래도 국수를 넣어 삶아 풀기가 많던 라면은 죽처럼 퍼져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했다. 그렇거나 말거나 우리 형제들은 오매불망 라면만을 기다렸고, 국수가 들었건 말건 그릇을 깨끗이 비워댔다, 그렇지만 라면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달걀과 쇠고기를 얹은 라면을 서로 양보해 가며 실컷 먹는 간절한 꿈은 버릴 수 없었다.
한번은 작은 아버지가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을 초대했다. 걸어서 1시간쯤 걸리는 곳에 사시던 작은 아버지는 우리가 안 올까봐 달걀 얹은 라면을 삶아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도 이제 서로 양보하는 화목한 형제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꿈을 꾸며 얼씨구나 먼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린 것은 무지막지하게 큰 대접에 가득 담긴 정체불명의 죽이었다. 장남인 내 아버지 공부 뒷바라지에 작은 아버지는 농사일만 하다 늦은 나이에 마음이 온전치 못한 작은 어머니에게 늦장가를 드셨다. 그런데 그 작은 어머니가 시아주버니와 조카들을 잘 대접하려는 마음에 그만 처음부터 달걀을 열 개 푼물에 라면을 열 개나 삶았던 것이다. 나는 크게 실망해 억지로 떠 먹었지만, 웬 일인지 맛이 기가 막혔다.
가끔 아내와 아이들 없이 혼자인 날이면, 달걀 푼물에 라면 죽을 끓여 꾸역꾸역 떠먹는다. 한 술 뜰 때마다 그리워진다, 어떤 투정도 다 받아주시던 할머니와 어머니, 그 날, 당황해 어쩔 줄 모르던 작은 아버지와 많이 먹으라며 해맑게 웃던 작은 어머니, 동생 부부를 애틋하고 미안한 눈빛으로 보던 내 아버지...... 내 나이 그 때 아버지 나이를 한참 지났고, 어디서도 어느 분도 뵐 수 없지만, 그리운 그 맛은 할머니 나이를 더 지나도 그대로 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