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할아버지 댁에서 하루의 시작은 특별했다.

잠깐 깨서 정신을 차려 보면 아직 깜깜한 새벽인데도 할아버지가 지게에 땔감을

한짐 해가지고 들어오시는 게 보였다. 언제 일어나서 저렇게 나갔다 오시는지 신기했다.

날이 밝으면 정지의 작은 문으로 하루의 첫 끼니가 들어 왔는데, 할아버지의 밥은 그 커다란

스테인레스 주발을  채우고도 산이 되었다. 말그대로 고봉 밥이었다.

할아버지의 새벽일은 식구들에게 일용할 땔나무를 구하는 일이자 강도 높은 운동이었을 터

많은 밥을 별 찬 없이도 참 맛나게 드셨다.

 

밥을 다 드실 때쯤 할머니가 가마솥을 박박 긁어 누룽지를 내오시는데 나는 밥을 먹다가도

중단하고 누룽지 그릇을 받아들었다. 할머니는 밥을 다 먹고 먹어도 네 것이 있다고 하셨는데

혹시 못먹게 될까 일단 누룽지부터 해치웠다. 구수한 그 맛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거였다.

할머니가 할아버지 그릇에서 덜어준 거였는지 내가 먹는 양 정도가 더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난 늘 누룽지를 원했고 늘 누룽지를 먹었다.

 

할머니의 성정은 그닥 고분고분하지 않았는데 식사시간만은 할아버지에게 공손했다.

그런 태도는 가장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을까 싶다. 부모님이 짝지어 준 할머니를 보고

안예쁘다며 돌려보내라고 했었다는데(엄마한테 들은 적 있다) 자식 열을 낳고 백년해로 하셨다.

사실 할아버지는 키도 크고 슬림한 몸매에 중절모와 두루마기가 잘 어울리는 훈남 쪽이었는데

반해 할머니의 외양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지독히 가난한 할아버지에게 시집와서 장정 한명

몫을 너끈히 해낸 할머니는 훌륭한 파트너였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직업이 농부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니까.

 

지금 기준에서 보면 할머니의 가마솥밥은 특별한 밥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항상 보리가 약간

들어간 하얀 쌀밥을 지으셨다. 보리가 10분의 1쯤 들어갔을까 그래서 보리는 드문드문 보이고

그냥 하얀 쌀밥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웰빙이다 뭐다 해서 백미를 멀리하고 잡곡밥을 먹으려

한다. 나도 검정콩, 현미, 흑미 등등이 들어간 잡곡밥을 먹고 있다. 건강에는 이롭겠지만 전기

밥솥이 짓는 잡곡밥맛은 내가 그리워하는 밥맛에 한참 못미치는 느낌이다. 밥을 먹을 때

국이나 반찬도 중요하지만 밥맛에 유독 예민하게 된 건 다 할머니의 가마솥밥 때문이다.

 

벌써 오래 전 할머니의 부엌이 입식 부엌으로 바뀌었고 가마솥도 사라졌지만

굴뚝에 피어오르던 밥 짓는 연기, 뜸 들일 때 나는 밥냄새, 그 시절의 할아버지, 할머니..

모든 것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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