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정기검진 받으러 병원에 갔다. 병원로비를 지나는데 여러개의 약주머니 속에 크고 하얀 영양수액이 보였다. 그 수액 주인의 뒷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아 보이며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과 동시에 눈물이 왈칵 솟아 주채할 수 없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희끗희끗 흰머리카락도 듬성듬성 섞여있는 그분의 뒷모습이 아빠의 뒷모습과 너무나 흡사하여 얼굴을 확인하고 싶기까지 했다.
아빠는 2006년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2년을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다. 힘든 항암 치료도 잘 견디시고 치료중에 해외여행을 다니실 정도로 잘 이겨내셨다. 그렇게 우리곁에 계셔주길 간절히 바랬는데 암이 재발이 되고 돌아가시기전 52일동안은 음식을 드시면 안되었다. 복막으로 전이된 암세포들의 횡포로 장유착이 심하여 의사로부터 음식 섭취 금지 오더가 내려지고 병원에서 보았던 그 환자가 맞고 있던 영양수액을 맞아야만 했다. 사람이 살면서 먹는 즐거움을 생애 마지막에 그렇게 빼앗긴 채 아빠는 그 긴 시간을 음식에 대한 유혹 내지 집착을 단한번의 내색없이 이겨내시며 오히려 간병하시는 엄마와 우리들, 문병오신 친지들 식사를 챙기고 걱정하셨다.
한달여의 서울의 대학 병원 생활을 접고 시골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옮긴 날이 아빠의 생신날이었다. 그러나 아빠는 어떤 음식도 드시면 안되었지만 (의사가 보았다면 야단쳤을테지만) 시골로 내려오는 동안 영약수액도 중단된 상태라 조금이라도 기력 회복하시라고 나는 미역국물을 몇 숟가락 떠드렸다. 그것이 아빠가 30여일만에 혀로 느낀 음식맛이었다.
그 다음날 병원에서 수액 맞고 돌아오시는길에 내생일이라고 직접 장을 봐오신 아빠, 아빠는 여전히 드시지 못하는데 집안에선 아빠께 너무 송구하게 음식 냄새가 풍기고 아빠를 제외한 온가족은 둘러앉았었다.(아빠와 나의 생일은 음력 9월 4일로 같은 날이었다. 그러던것이 내가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면서 내 생일날 미역국을 챙겨주시려고 가족 중에 나만 양력으로 지내게 되었다. 10월 3일. 아빠가 가시던 그해는 그렇게 하루 차이였다.)
이제 가을이다. 아빠의 생신도 가을이 무르익는 무렵이고 아빠가 가신때는 단풍과 함께 가을이 눈부신 때였다. 마지막까지도 소박한 생일상은 커녕 음식을 드실수 있는데 드시면 않되었던 아빠의 제사상엔 올해도 미역국을 올릴 것이다. 아빠의 생신상을 차려드리고 싶은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