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겨울을 보낸 이쯤 사람들은 그 한 해 겨울이 제일 추었다고들 한다. 올 한 해도 유난히 많은 눈과 겨울비로 여느해 못지 않은 강추위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옛날 겨울 추위에 비할랴. 기와집 끝자락에 대롱대롱 매달린 고드름에 방문 밖 쇠문고리가 추위에 얼어 손에 짝짝 달라붙은 그 한기.
그 시절 마땅한 주전부리도 없던 시절. 가을 수확철 마당 한켠에 땅을 파고 묻은 장독대 속에 켜켜히 쌓은 무, 겨울 추위로부터 안전한 저장방식으로 안방 윗묵 종이박스에 담아 놓았던 고구마를 꺼내 칼로 깍아 먹으며 그 긴 겨울밤을 보냈다. 겨울철 장독 속에서 꺼내 깍은 무는 그 시원함과 달짝지근한 맛으로 주전부리를 대신했으며 동네 사람들 삼사오오 모여서 동그랗게 듬성 듬성 썰어 밀가루 입혀 지진 부침개는 한 끼의 식사를 대신하기도 했다. 지금 칠십의 중반을 넘으신 머리 힛긋힛긋하신 어머니가 겨울철마다 물리도록 많이 해주셨던 무국. 어머니는 입에서 입김이 모락모락 나는 겨울 아침 아궁이 딸린 부엌문에 들어서서 큰 가마솥에 물 몇 바가지를 붓고 장작불을 지피기 시작하셨다. 지금은 흔하게 쓰는 국물의 주 요리로 멸치 다시마로 만든 육수는 생각할 수 없었던 그 시절. 몇 바가지 넣은 맹물이 끓는 동안 한 손에는 무를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대패 썰듯 무를 쓱쓱 썰어대셨다. 그러면 대패 쌓이듯 켜켜히 쌓인 썰어진 무는 그 팔팔 끓은 물에 고추가루를 확 뿌린 고추물 속에 퐁당 집어 넣어졌다. 빨갛게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 속 가마솥에는 그렇게 고추가루 무국이 끓기 시작했다. 대파도 썰어 넣지 않은 오로지 재료라고는 우물가에서 퍼다 부은 찬물과 고추가루,겨울 무, 다진 마늘, 소금으로 어울려진 고추무국이었지만 오래도록 장작불에서 끓인 그 무국은 칼칼하니 얼큰하면서도 그 뜨거운 국물은 우리들의 얼린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식구들 중 누구 한 명이라도 감기에 걸렸다 싶으면 더 자주 밥상에 올리셧던 고추가루 무국. 그 매운 맛으로 감기도 뚝딱 떨어지게 하고 싶으셨던 어머니의 마음이 아니였을까.
요즘은 먹는 것이 너무 흔하고 많아진 시절이다. 요리의 재료들도 넘쳐나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런 시절에 그 옛날 춥디 추운 겨울에 먹었던 고추가루무국이 지금 현대인들의 입맛을 어떻게 사로잡을 수 있으랴. 그러나 그 단순한 재료로 끓인 고추무국 속에 담아있는 어머니의 마음과 정성은 복잡한 사람들의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할 수 있으리라.
저 멀리 봄이 오는 들녘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
저녁에는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 식사는 무엇을 하셨는지 물어보아야겠다. 설마 고추가루 팍팍 뿌려 끓인 고추무국은 아닐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