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남의 땅에 농사를 짓고 계시는 소작농의 딸이며, 4남매 중 둘째이며, 큰딸이다.
지금은 나이 마흔이 되어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어렸을 적 우리집은 넉넉지 못한 살림에 여름에는 꼭 보리쌀이 70프로쯤 섞인 밥을 먹으며, 엄마는 툭하면 학교준비물 살 돈을 옆집에 빌리러 가시곤 했었다. 그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지금도 입안에서 미끌거리는 보리밥의 식감을 싫어하고, 어린 마음에 엄마가 돈 빌리러 쑥스럽게 웃으며 옆집대문을 여시는 모습이 정말 보기 싫었다. 엄마보다 나이도 한참 어린 새댁한테 돈 몇 백원을 빌리려고 아침부터 찾아가는 엄마심정 같은 건 헤아릴 턱이 없었다.
비닐하우스가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 농촌은 가을추수와 함께 할 일이 없어진다. 그래서 긴긴 겨울 하루가 멀다 하고 아저씨들은 막걸리를 한잔 걸치시고 코가 빨래지셔서 마을 구판장 앞에서 윷놀이를 하시거나, 누구네 집 사랑방에서 화투판을 벌이곤 하셨다.
엄마는 이렇게 찬바람이 불 때쯤이면 몇 달씩 시에서 운영하는 화원에 일하러 나가시곤 했다.
큰딸인 나는 그런 엄마를 대신해 학교가 끝나면 집에 와서 집안 청소와 빨래, 그리고 저녁밥을 해놓곤 했는데, 집에 와서 아무도 없을 땐 너무도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럴 땐 신발을 벗지도 않은 채 마루에 책가방을 휙 던져놓고 한나절을 놀다가 어둑어둑해져 엄마가 오셨을 때쯤 집에 들어가곤 했다.
그런 나에게 가장 꿈같은 날들은 고추잠자리가 집 담벼락에 한가득 붙어있는 여름방학이 지난 9월쯤이었다. 엄마는 집에 계시면서 재봉질을 하시기도 하고 다듬이 방망이를 두들기기도 하셨는데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 시기에 엄마는 넷이나 되는 우리남매들을 위해 자주 간식을 만들곤 하셨는데, 주로 그것은 부엌 제일 큰 가마솥에 들어있었다. 어떨 땐 뽀얀 찰옥수수가, 어느 날은 따끈한 고구마가 또, 어느 날은 막걸리를 넣은 찐빵이 들어있었다. 오후 3,4시쯤 학교에서 올 때면 오늘은 솥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기대하면서 집이 가까워지면 숨이 차게 뛰어와 학교 다녀왔다는 인사보다 가마솥을 먼저 열어보곤 했다. 그럴 때면 학교에서 1시간가까이 걸어오는 하교 길이 지겹지 않았다.
가마솥에 들어 있던 엄마의 간식 중에 백미는 막걸리를 넣고 만든 찐빵이었다. 막걸리에 요즘 보기 힘든 알약처럼 생긴 하얀 ‘당원’을 녹여 넣고 밀가루반죽을 해서 뚜껑을 덮고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 놓아 발효시킨 반죽으로 빵을 만드셨다. 찐빵이 빨리 먹고 싶은 우리들은 ‘저녁때나 되어야 한다’, ‘자꾸 열어보면 늦게 부풀어 오른다’는 엄마말씀을 들으면서도 몰래몰래 이불을 걷고 뚜껑을 열어보곤 했었다. 생밀가루반죽을 씻지도 않은 손으로 찍어먹다 들킨 적도 많았다.
직접 농사지은 팥을 몇 시간 삶아 설탕을 넣고 만든 단팥 소를 큰 수저로 푹 퍼 넣어 찐빵을 만들 때면 4남매가 주욱 둘러앉아 엄마가 빵 만드시는 손놀림을 신기하게 지켜봤었다. 엄마는 물을 넣은 가마솥에 깨끗한 볏짚을 깔고 삼베로 된 보자기를 덮고 그 위에 만들어진 빵을 얹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셨다. “자~ 이제 익기만 하면 되니 우리 큰딸은 방청소할까?” 따끈하고 달콤한 찐빵을 먹을 생각에, 정성스레 우리를 위해 만들어 주신 엄마를 위해 ‘이 정도는 기분 좋게 해야지’하는 마음으로 빗자루 질은 그 어느 때보다 경쾌했다.
나도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찐빵을 집에서 만들어 준적은 한 번도 없다. 게다가 직장생활을 한다는 핑계로 아이들의 간식은 거의 유명제과에서 파는 빵, 피자, 떡볶이 등 사 먹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어릴 적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던 시절, 손수 만들어 주시던 엄마의 찐빵 맛을 떠올릴 때면 내 아이들에게 미안하기까지 하다.
가끔 여동생과 이런 말을 주고 받곤 한다. 어렸을 땐 우리 집이 가난한 게 불만이었는데 지금 생각 해보면 물질적으로 결핍 됐던 그 삶이 우리에게 작은 것에도 소중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서 오히려 부모님께 감사한다는 이야기를.... 그 시절에도 학교 앞 문방구 근처에는 빵집과 떡볶이 집과 호떡포장마차가 꽤 있었다. 사먹어 본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