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살 씨간장이 맛의 씨 뿌린 ‘서커스’

박미향 2010.03.16
조회수 23082 추천수 0
파평 윤씨 명재 윤증 종가 떡전골
뚝배기보다 장맛, 버선발 한지 붙인 ‘꿀독’의 묘기
참기름 재운 게장은 아~!…쓱쓱 비벼먹으면 꿀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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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랑, 신뢰, 가족, 연인, 정의, 부, 명예…? 사람마다 다르다. 삶은 그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찾아 나서는 여행길일지 모른다. 하지만 만만치 않다. 해답은 언제나 롤러코스트 같다. 
 
우리 맛에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다행히 그 답은 명쾌하다.
 
한국음식연구원 전희정교수는 “장입니다. 맛을 내는 조미료역할을 서양에서는 소금이 했지만 우리는 간장, 된장, 고추장이 했지요. 우리음식의 맛을 좌우합니다. 장맛이 좋으면 그 집안이 성한다는 옛말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지요”라고 말한다. 전교수는 장을 담글 때 중요한 것은 물과 소금, 메주, 독이라고 말을 한다.
 
메주와 간장 분리 기간도 여느 집보다 서너해 긴 4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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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고즈넉한 파평 윤씨 명재 윤증 고택(중요민속자료 제190호)의 종가의 장은 유명하다. 단아한 한옥 마당에는 수 백 개의 장독이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며 줄서있다. 물은 조상대대로 먹었던 우물에서 모터를 이용해서 퍼 올려 쓰고 메주는 가을에 농사지은 우리 콩으로 만든다. 소금은 몇 해 동안 간수를 뺀 서해안 천일염을 쓴다.
 
재료도 건강한데 이 댁의 장은 다른 집과 다른 점이 있다. ‘씨간장’, ‘씨된장’이다. 윤증선생의 13세손인 윤완식(55)씨는 “수 백년 이어온 전통입니다. 아주 오래전 담근 장맛이 아주 좋았던 때가 있었어요. 한 270여년 전이지요. 그때 그 장을 따로 보관해서 다음해 장을 담글 때 사용했어요. 해마다 그렇게 이어져 내려왔어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집 간장과 된장은 ‘전독간장’, ‘전독된장’이라고 부른다. ‘전’은 ‘前’나 ‘傳’을 쓴다.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다는 뜻이다.
 
메주와 간장을 분리하는 기간도 다른 집과 다르다. 보통 장을 담그면 30~40일 지나 메주와 간장을 분리하는데 이 댁은 약 4개월 넘어 분리한다. 윤씨는 “메주 속에 있는 좋은 것들과 맛이 충분히 우러나게 되요”라고 말한다. 장을 담그는 때도 그해 기후와 온도 등을 판단해서 황균국(메주의 발효를 돕는 균)이 가장 활발한 때를 잡는다. 이 댁에서는 보통 정월 말일에 담근다. 예부터 그날이 되면 향긋하고 구수한 메주냄새가 온 마을을 진동해서 마을 사람들이 모이곤 했다.
 
소금 고르는 감은 예술…단 하루도 장독대 안 비워
 
Untitled-1 copy 4.jpg그는 11대 종부인 어머니, 양창호(92)선생에게서 장 만드는 법을 모두 익혔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어머니의 ‘감’을 못 따라가는 것이 있다. 소금 고르는 법이다. 양씨는 가장 맛난 상태의 소금을 골라내는 기술은 최고봉이다. “저도 올해 생산된 소금은 한 움큼 쥐면 감이 와요, 좋은지 아닌지, 하지만 어머니는 3년, 5년 간수를 오랫동안 뺀 소금들도 한 번만 쥐어보시면 ‘됐다’ 금방 아셔요.” 그는 아직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19살에 시집와서 70년 넘게 한 가문의 종부의 역할을 한 어머니의 맛에 대한 감각을 따라갈 수가 없다.
 
소금은 한 움큼 쥐었을 때 손에 붙지 않고 바삭바삭한 것이 좋다. 잘 붙는 것은 쓴맛이 있고 그것으로 장을 담그면 장도 쓰다. 좋은 소금으로 절인 배추는 그것만 먹어도 맛난 법이다.
 
독도 중요하다. 북쪽으로 갈수록 그 항아리 모양은 위와 아래가 같은 원통이다. 빛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다. 아래쪽 지방일수록 가운데가 넓고 주둥이가 좁다. 윤씨는 온도가 점점 올라가서 전라도에서 많이 사용했던 독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독의 겉에는 한지를 버선모양으로 잘라 거꾸로 붙였다. 조상들의 지혜가 숨어있다. “한지가 빛을 많이 반사해서 벌레들이 꼬이지가 않지요. 어머니는 그 한지 위에 ‘꿀독’이라고 글자를 적었어요, 꿀처럼 맛난 장이 되라고 기원하신 거죠”라고 말한다.
 
전희정교수는 그 유래가 버선본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 어머니들은 집안에서 가장 잘 안 찢어지는 종이인 버선본을 사용했다.
 
 

명재 고택 사람들은 한국전쟁 때 딱 하루 집을 비운 것 빼고는 늘 이 장을 지켜왔다. 나들이 다녀오면 깨끗하게 몸을 씻지 않고는 장독대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윤씨는 “그때는 미신인가 했는데 잡균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 선조들의 지혜였죠”라고 말한다. 장맛은 그렇게 집안사람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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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 김 한 장과 간장만 있으면 세 끼 끼니 뚝딱

 
장맛이 좋으니 이 댁의 모든 음식은 간단한 나물 무침조차 맛깔스럽다. 이 댁의 둘째딸, 윤경남(64)씨는 “어릴 때 하얀 밥에 살짝 구멍을 내고 달걀노른자를 얹고는 우리 집 간장을 뿌리고 그 위에 살짝 꿀을 얹어 비벼먹었어요. 반찬이 없어도 그렇게 맛날 수가 없었어요”라고 말한다. 구운 김 한 장과 간장만 있으면 세 끼 끼니를 뚝딱 배부르게 해결했다.
 
윤씨는 어머니, 양창호 선생이 그 간장으로 만들어줬던 떡전골과 게장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소금이 아니라 간장으로 간을 하는 검붉은 나박김치도 독특하다.
 
떡전골은 모든 재료에 간장을 조금씩 넣어 간을 하고 떡은 육수에 하루 동안 재워둔다. 육수는 갈비뼈로 만든다. 양씨는 떡의 굳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칼이 힘겹게 들어갈 정도로 굳어있어야 재워두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다진 쇠고기 살코기에도 간장으로 조물조물 간을 한다. 떡이 익은 후에도 간장으로 마지막 간을 한다. 쫄깃한 떡 맛이 그대로 살아있다. 싱겁지도 짜지도 않은 우아한 맛이다.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마치 ‘태양의 서커스’의 단원들이 높은 외줄에서 정확한 균형을 잡고 활짝 웃고 있는 맛이다. 비단 옷 입은 우아한 우리 어머니의 단아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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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난 간장으로 담근 게장을 말할 필요도 없다. 이 댁은 민물게를 참기름에 하룻밤 재우고 게장을 담근다. 고소한 풍미가 입안으로 온통 아이의 까르르하는 웃음처럼 퍼진다. 전희정교수는 “참기름의 기름은 지나치게 간장이 많이 침투해서 짜지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다”라고 말한다. 나박김치는 그 검붉은 색이 묘한 신기함을 자아낸다. 납작썰기한 배추와 무는 소금에 절이지 않는다. 김치의 간은 소금이 아니라 간장으로 한다. 고춧가루 물과 어우러져 싱그럽다. 맑은 물을 마시는 듯 하다가 이내 알싸한 매운맛이 코끝을 간지럼 태워 온몸이 신나는 춤을 춘다. 그 춤사위에 나박김치사이로 동동 떠다는 달디 단 배 조각이 한수 거든다. 간장은 그 색만큼 진하다. 진한데 짜지 않다. 혀끝을 살짝 건드리는 단맛도 튀어나온다. 만날수록 폭폭 빠져버리는 연인을 닮았다.
 
음식은 의외로 단아하고 검소…증조부는 일찍 깬 천문학자
 
명재고택 종가의 음식은 단아하고 검소하다. 파평 윤씨 중시조인 명재 윤증(조선 중기 학자. 소론 진보세력을 이끔) 선생은 제사도 짐이 될 수 있다며 간소하게 치르라고 후손들에게 일렀다. 불천위제사도 지내지 않고 제사상에 전도 없을 정도로 간소하다. 날도 양력으로 잡는다. 윤완식 선생의 증조부 윤하중 선생 때부터다. 그는 천문학자였다. “1944년에 돌아가셨는데 1939년에는 동아일보에 천문학에 관한 글을 기고도 하셨어요. <성력정수>라는 논문도 쓰셨어요”라고 윤씨가 말한다. 음력으로 하면 빠지는 날도 있으니 양력으로 해라 일렀단다. 신학문을 빨리 받아들인 증조부는 자손들을 모두 서울로 유학 보낼 정도로 교육열이 대단했다. 그는 1년에 한번 손자, 손녀들을 불러 모아 1년 계획서를 제출하게 했다. 그 내용을 보고 용돈을 주었다. 나이가 많은 동네 노인들은 그가 독립자금도 지원했다고 말한다.
 
양창호 선생은 19살에 중매로 11대 종손 윤여창 선생과 결혼해서 70년 넘게 고택을 지켰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군사정권을 견딘 강단 있고 활달한 여성이었다. 종부는 “내 퇴직금을 다오”, “사내들이 그것도 못 하냐”고 호통하실 정도로 여장부다. 지금은 귀가 어두워 예전처럼 사람들과 소통하기는 힘들지만 미각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자식들은 말한다.
 
12대 종손인 윤완식씨는 7남매의 둘째 아들이다. 75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 형도도 12년 전 작고하자 그가 ‘종손’을 대행했다. 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윤씨의 큰 아들 윤형섭씨가 종손의 대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2학년 어린 후손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문중에서는 그를 12대 종손으로 정했다. 윤씨는 12년 전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집에 내려와 집안을 돌보면서 우리 전통문화에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사단법인 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를 만들어 고택을 수리하고 종가 사람들이 고립되지 않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고택 지켜내는 한 방법으로 교동간장 상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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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택 한쪽에 아담한 서가, <작은 도서관>도 만들었다. 누구나 그곳에서 우리문화와 관련된 책을 볼 수 있다. 지난해에는 종가의 유물 1만643점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기탁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땅을 파고 유물을 묻어 지켜낸 것들이다.
 
그는 집안의 간장을 상품화해서 ‘교동간장’을 만들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어요. 고택을 지켜내기 위해서 한 방법이지요. 빈집이 되면 안 되죠. 사람이 사는 집이어야 하니깐. 어머니는 반대도 많이 하셨지만 지금은 잘했다 하십니다. 장독문화도 보존하고 싶었고 우리음식이 나이가 들수록 얼마나 건강음식인지 깨달으면서 결심했지요”라고 말한다.
 
봄꽃들이 만발하면 명재고택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찾아든다. 세상 사람들과 고립되어서 홀로 외롭게 있는 낡은 집이 아니라 현대인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곳이 되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도 길게 늘어선 장독대를 자신의 카메라에 담기 위해 4계절 이곳을 찾는다.
 
집을 나서는데 종부 양창호 선생이 한마디 던진다.  “우리 집 간장 맛 어때요?” 돌아오는 답은 “따봉.” 엄지손가락이 기와집 처마만큼 올라간다.
 
고택체험을 할 수 있다. 미리 식사를 예약하면 이 댁 간장으로 만든 된장국과 간소한 반찬을 맛 볼 수 있다. 간장은 500그램이 1만9천 원, 900그램이 3만3천 원이고 된장은 450그램이 1만원, 900그램이 1만9천 원이다.
 
글·사진 박미향  <한겨레> 맛 기자 mh@hani.co.kr
 
 
◈ 윤경남 선생이 알려주는 떡전골
 
① 조금 딱딱한 가래떡을 3~3.5센티로 자른 후에 4등분한다.
② 갈비뼈로 만든 육수를 한 5~6시간 끓인다.
③ 육수에 떡을 12시간 재워둔다.
④ 다음날 지방이 없는 순 살코기를 준비해서 곱게 다진다. 다진 고기에 파, 마늘을 넣고 배도 갈아 넣는다.
⑤ 참기름과 전독간장으로 간을 해서 조물조물 만진다. 재워 둔 떡과 육수를 분리한다.
⑥ 육수의 기름을 걷어내고 전독간장을 아주 소량 넣어 간을 한다. 그 육수를 끓이다가 떡을 넣는다.
⑦ 준비한 양념 고기를 넣고 익힌다. 다 익으면 황백지단과 석이버섯을 고명으로 올린다. 석이버섯은 끓은 물에 불려 돌돌 말아 잘게 썰어 올린다.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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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이메일 : mh@hani.co.kr       트위터 : psol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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